"오랜만에 비 내리는 화요일이네요. 추석 때 먼 길 왕래하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런 일 저런 일 겪어 마음 고생도 심하셨죠? 민들레 놀러 오셔서 힘든 몸과 마음도 푸시고, 힘 나게 얘기 나누며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대전 대덕구 법동 민들레의원 앞 작은 칠판에는 저 글이 적혀 있었다. 병원 측이 대기실에 놓아둔 '알콩달콩 한마디'라는 편지함에서 고른 주민 이해순씨의 글이었다. 이 병원은 주민들이 출자해 운영하는 '의료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해순씨 역시 조합원. '내 병원'이니 초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 2일 찾은 병원 대기실은 환자 10여 명과 간호사들의 수다로 정겹게 왁자지껄했고, 동화책 가득한 벽면 앞 대형 TV 화면에는 주민들의 스냅사진들이 한 장 한 장 넘어가고 있었다.
의료생협은 1994년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봉사활동 하던 연세대 의대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지역 청년들과 합심해서 만든 안성의료생협이다. 이후 원주 전주 인천 등지에 의료생협이 잇달아 만들어졌다. 지난 해에만 6개가 신설되는 등 최근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부실 진료와 과잉진료의 이중 불신에 빠진 의료현실의 대안으로 의료생협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문을 연 민들레의원은 국내 5번째 의료생협.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병역 대체복무로 대전에 왔던 내과전담의 나준식(46) 씨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만들었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아이들 병치레 상담으로 이웃들과 친해진 터에 의무복무 끝나고 떠나려던 그를 주민들이 붙잡았다고 한다. 나씨 역시 2000년 의약분업사태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했다고 말했다. " 정부와 의료계가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의료가 돈벌이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발기인 303명으로 시작한 병원은 현재 조합원이 3,440명으로 불어났고, 한의사를 포함한 의사 4명과 간호사 20여 명이 가정의원과 건강검진센터, 한의원, 치과, 노인요양센터, 심리상담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호점인 둔산점도 개원했다.
민들레의원은 지난 해 3층에 있던 치과를 2층으로 옮겼다. 노인과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서였는데 조합원인 주민과 의료진이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악명 높은 '3시간 대기 3분 진료'도 없고, 항생제 과다처방 걱정도 없다. 의사가 이윤 부담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2011년 하반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 평가에서 민들레의원의 항생제 사용 비율은 전국 45%를 크게 밑도는 8%였다. 조합원 송미자(43)씨는 "의사가 아니라 내가 OK할 때까지 상담 받고, 처방에도 내 의견을 반영할 수 있다"며 "내 건강의 주인이 의사가 아닌 나라는 사실을 여기 와서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길게는 30분까지 의사와 진료 상담을 해봤다고 자랑했다. 의사들이 조합원 거의 전원을 잘 아니까 자연스럽게 주치의가 된다. 오경애(73)씨는 10년째 다른 병원 안 가고 민들레 의원만 찾는다는 했다. 오씨는 "여기 오면 건강도 챙겨주지만 치매 걸리지 말라고 종이 접기와 장구도 가르쳐준다. 곧 죽게 생겨도 여기 오면 의사와 간호사들이 어떻게든 살려 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5만원 이상만 출자하면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조합원은 의료비를 할인 받고 병원 운영에 참여할 수도 있다.
물론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많다. 조세종 이사장은 "어렵게 구한 의사가 1년도 안 돼 그만 둘 때도 여러 번 있었고, 취약계층을 위해 가외 시간에 왕진을 나가도 정부 지원이 한 푼도 없다. 그러면서 다른 병원들과 경쟁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준식 원장은 "왜 항생제 안 주냐고 화를 내거나 의료기기가 낡았다고 불평하는 환자도 있다. 환자를 많이 받을수록 수익이 남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체계에서 최신 기기를 구입하려면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고 말했다.
더 본질적인 숙제는 진료다. 가정의원의 경우 과소진료를 막기 위해 의사 두 명이 하루 150명 이상을 진료하지 않기로 했는데, 현재 한계상황이다. 재정안정성도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 가정의원은 이익이 거의 없고, 치과 비급여 치료에서 수익을 내는데, 진료 자체를 최소화하는 데다 가격도 일반 병원보다 30~50% 저렴하다. 조합원은 진료비의 10%를 덜 낸다. 흑자가 나면 이익배당 대신 의료기 구입 등 투자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익을 못 내는 구조. 지난해에는 21억원 매출에 1억여원 적자를 기록했다. 둔산점을 개원한 탓이었다. 행정에 어두웠던 초기, 양한방 협진 환자의 보험청구 실수로 영업정지를 당한 적도 있고, 노숙인 약 처방을 의료진의 이름으로 했다가 적발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들을 극복해온 것도 주민들과 의료진이다. 조 이사장은 "지난해 7월 유동성 위기가 와서 의료진의 임금이 체불될 위기였다. 조합 게시판에 사정을 설명하고 증자 요청을 했더니 한달 만에 1억원이 모였다. 이런 가슴 벅찬 경험이 의료생협에선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78년 '모두에게 건강을(HEALTH FOR ALL)'이라는 비전을 발표하며 국가 1차의료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네의원에 해당하는 1차의료기관이 주민들의 주치의로 기능함으로써 병을 예방하고 사회적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조세종 이사장은 "우리나라 병원들은 무한 경쟁 속에서 수익에 연연하며 환자와 인간적 관계를 상실했다"며 "주민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마을 주치의 역할을 하는 의료생협은 상업화된 의료 시스템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대전=정지용 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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