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가 8남매의 맏딸이시라 이종사촌 동생들이 많다. 어림잡아 30명쯤 되는데 그 중 '안나'라는 서구적 이름의 여동생이 있다. 요즘에야 아이 이름을 지을 적에 한글로만 짓는 경우도 많고 리나, 지나 등 서구적 이름도 많지만 안나가 마흔 가까우니 그 시절엔 결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안나는 시골 사시는 넷째 이모의 딸로 우리와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대화를 오래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넷째 이모나 이숙께도 안나의 이름에 대하여 물은 적도 없었다. 다만 이런 시크한 이름을 짓다니 이모와 이숙의 감각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다.
이런 생각은 어느 해인가 보기 좋게 깨졌다. 어머니가 넷째 이모와 통화하시며 "그래! 그년 이름을 안나라고 한 덕이야. 이름 덕 본 거야…" 운운 하시는 말씀을 들은 후 그 내막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안나는 딸 셋을 연달아 낳은 넷째 이모의 "더 이상 딸을 낳지 않겠다"는 눈물어린 결의의 표현이었고 그 덕택(?)인지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안나가 '말숙이', '딸막이', '끝순이', '끝녀'와 발음만 달랐지 결국 같은 뜻의 이름이었음을 알게 된 후 그 이름을 편안한 심정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는 형제를 헤아릴 경우 딸은 숫자에서 제외할 경우가 많았다. 나는 4남 1녀의 막내인데 다섯 번째가 아니고 넷째로 불렸다. 예법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다 다르고 또 그 남도와 북도가 다른데다 좌도와 우도가 다르고 당색과 집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제사상에 쇠고기가 오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율곡의 집안에서는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평생 일만 시키고 죽어서도 인간의 제사용으로 쓰이게 할 수 없다"라고 율곡이 역설하여 율곡 집안의 제사상에는 쇠고기가 오르지 않게 되었다는 원로 한학자 선생님의 말씀이다.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것은 집안의 법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다 나온 말씀인데, 감히 그 진위를 추적해 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는 생각이다. 하여간 우리 집안의 가족 헤아림 방식에서 딸 곧 누나는 형제건 남매건 서열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영어 선생이 "서양 여자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우리나라 여자들은 결혼해서도 자기 성을 쓰니 우리가 여성의 권리를 더 존중한다"고 목에 힘주며 말한 것을 기억한다. 걸핏하면 여성을 비하하던 그가 갑자기 여권론자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의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한글 전용' 등 당시 강하게 불었던 민족주의 바람 속에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 속을 모르겠다. 대개 계통 없이 떠드는 인간들의 의도는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런 허울 좋은 말에 이제는 속지 않는다.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결혼한 후에도 자기 성을 유지하는 것은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형제의 한명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다가 시댁에서는 그 집의 일원이 되지도 못하는 우리나라 여인의 삶이란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을까.
언젠가 여자 후배가 "여자를 무시하는 사회 풍조가 계속될까요?" 하는 말에 "여자들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고 있으니 다음 세대에는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명나라 말기에 여아 살해 등으로 여자가 모자라게 되었지만 남자들의 과거 급제 스트레스로 인해 여자에 대한 억압은 오히려 심해졌다는 이라는 책을 읽고 이런 확신이 다 날아갔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될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소박한 믿음이 지켜지길 바란다. 그나저나 자기 이름의 비밀을 만천하에 떠들어댄 오빠라는 자의 만행을 안나가 납득할까 그게 두렵다. "쏘리! 안나!"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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