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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0월 11일] 말과 이미지의 판도라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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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0월 11일] 말과 이미지의 판도라상자

입력
2013.10.1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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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출신 미술가 알프레도 자르의 '실제 사진들'이라는 설치작품이 있다. '르완다 프로젝트'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은 1994년 4월에서 7월까지 르완다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백만여 명의 양민이 집단 학살된 사건 이후의 현장을 탐사한 작가의 수천 장 사진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관객은 그 많은 사진 중 단 하나도 볼 수 없다. 실상을 찍은 사진은 검은 상자에 밀봉된 채, 그 안의 사진에서 언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문구만 작품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병실에 서 있는 40세의 르완다 의사, 이노센트의 초상이다"같은 내용의 글이 사진을 담은 박스 겉면에 쓰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실제 사진들'은 의도적으로 감상자에게 생생한 사건 현장의 이미지 대신 작가가 간추린 몇 가지 정보와 작가의 입장에서 서술한 짤막한 사건 경위만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어떤 관객은 그 작품의 문구를 사실로 냉랭하게 읽어나갈 것이고, 또 다른 관객은 유혈이 낭자한 실제 학살 현장 사진보다 더 강렬하고 더 어지러운 장면을 상상해낼 수도 있다. 그 경우의 수는 감상자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실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은 감상자의 판단력 또는 상상력에 좌우돼 유동적이고 가변적으로 생성된다.

작가 자르가 작품에서 의도했던 한 축이 이와 같이 열린 형태의 수용, 즉 보편적 인륜과 상식을 압도해버리는 폭력적 사건을 단선적이거나 교조적인 방향으로 갈무리하지 않고 보는 주체에 따라 적극화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자르는 실제 사건과 누군가 또는 특정 미디어에 의해 중개되는 사건 사이에서 우리가 생각만큼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이를테면 일어난 일과 노출된 것, 그리고 사람들이 이면에 존재하리라고 상상하는 것 사이에서 여러 변질과 가공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각자가 파생하는 억견 및 억측이 사태를 전혀 다르게 끌고 갈 수 있음을 문제시한 것이다. 사실 문제적 순간에 말과 이미지는 마치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판도라상자처럼 종잡을 수 없고 어디로 튈지 모를 것이 된다. 때문에 혹시 불온한 의도에서, 혹은 자의적 망상에 빠져서 말과 이미지상자를 무책임하게 열어젖힐 경우 결국 세상에 온갖 불행과 악행, 슬픔과 고통, 상실과 파괴를 풀어낸 판도라처럼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낳는다.

내가 문득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 저널리즘의 행태와 그로 인해 유발되고 요동치는 공적 담론의 양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최종 형태가 사건의 실제성을 전달하는 말과 이미지이고, 그 매개된 말과 이미지가 다수에 영향을 미쳐 사태를 흔든다 할 때 우려스러운 일들이 횡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식 논란이다. 당사자의 검찰총장직 사퇴로 벌써 대중의 관심과 여론에서 가물가물해진 이 논란은 애초 조선일보가 9월 초 '특종'이라며 '단독' 보도한 기사가 시발점이었다. "채동욱 검찰총장 婚外아들 숨겼다"라는 매우 단정적이고 꽤나 자극적인 제하의 기사에는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얻어들은 단편적 이야기와 지인이라는 이들의 발언, 그리고 논란이 된 모자가 거주한다는 아파트 사진이 빨간색 점선 표시를 한 채 등장한다. 그것들이 모두 독자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11살 남자아이가 검찰총장 채동욱의 '혼외아들'이라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다. 첫 기사 이후 사태는 일파만파 퍼졌고, 근 한 달간 온갖 저널과 대중 여론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말과 이미지를 빚고 쏟아냈다. 그 사이 이해 관계자 간 반박에 재반박, 검찰총장 사표 제출과 청와대 사표 보류에서 처리까지 혼란이 거듭됐다. 하지만 해당 언론사와 거기 연관돼 반사이익을 볼 누군가들을 빼고 그 혼란에서 사람들이 얻은 것은 전무하다. 판도라상자에서는 마지막에 세상을 위한 '희망'이 나왔으나 그 저널리즘의 말과 이미지상자에는 그것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ㆍ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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