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합니다. 서울지역 1% 맛집으로 뽑히셨습니다." 서울 도곡동에서 작은 횟집을 운영하는 윤모(39)씨는 최근 한 케이블 방송사의 맛집 소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2007년 개업 이후 테이블 7개도 채우는 날이 거의 없었던 윤씨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교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도서를 기부하면 맛집으로 소개해준다"는 말에 결국 돈이 목적인 것을 알아챘지만 윤씨는 그래도 방송에 나가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 생각해 240만원을 이 외주제작사에 건넸다.
황당한 것은 방송이 나간 후였다. 해당 학교에서 책을 잘 받았다고 보낸 공문의 도서 구입 영수증에는 고작 20여만원이 적혀 있었다. 윤씨는 바로 외주제작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 제작사가 업주들에게 "정부가 지정한 권장도서를 기부한다"고 속이고 학교에는 절판된 재고 도서를 정가의 10분의 1 값인 권당 2,000원 안팎에 구입, 전달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는 이 같은 방법으로 식당 업주들로부터 8억7,000여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로 J사 대표 김모(32)씨를 구속했다고 10일 밝혔다. 경찰은 또 해당 맛집 프로그램의 방송 검수 때 좋은 평가를 해주는 대가로 김씨에게 18회에 걸쳐 4,400여만원을 받아 챙긴 모 케이블 방송사 전 간부 임모(43)씨와 홍모(40)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J사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맛의 OO'이라는 45분짜리 프로그램 60여편을 제작하면서 편당 8곳씩 식당 480여곳에서 160만~250만원씩 받아 챙겼다. 맛집 선정이라는 본래 방송취지보다 많은 곳을 섭외하려고 인터넷으로 무작위 선정한 식당들이었다. 이미 수십 차례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던 곳도 있었지만 손님이 거의 없는 무명 식당도 적지 않았다. J사는 방송 초기에 제작비를 요구하다 업주 대부분이 거부하자 수법을 바꿔 도서 구입비를 거론하면서 "방송 출연과 함께 기부천사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유혹했다.
조사 결과 김씨는 사기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10%만 도서 구입비에 사용하고 절반 정도는 자신의 아파트 대출금, 수입차 구입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연예지망생을 진행자로 기용해 제작비도 거의 들지 않았다. 이 제작사는 수입(월 매출 6,000만~1억원)의 대부분을 맛집 소개 프로그램으로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외주제작사가 케이블 방송사에 '방송만 나가면 송출료를 내겠다. 제작비는 주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해 방송이 나가게 됐다"면서 "송출료는 불법이 아니지만 이런 경우 외주제작사가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비슷한 범죄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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