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갈등은 '만국 공통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다 있다. 다만 선진국과 후진국을 갈라 놓는 건 갈등의 유무가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고 흡수할 수 있는 시스템의 작동 여부다. 이 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보다는 여전히 후진국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도 1990년대 이전까지는 국가적 사업추진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이 많았다. 특히 연방국가로서 주정부의 권한이 강하다 보니, 국책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갈등이 생기면 결국 법원판결이나 의회입법 등 통상적인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대안적 갈등해결 방식'(ADRㆍ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이다. ADR는 이해당사자 간 중재와 조정을 통해 화해를 유도하는 분쟁해결제도로, 중재기관을 따로 두고 협상과 조정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언론중재위원회나 상사중재원, 한국소비자원 같은 곳이다.
ADR은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에, 그래서 물리적 충돌이나 법정까지 가기 전에, 미리 예방하고 관리한다는 취지다. 이후 규제협상법과 행정규제조정법 등 입법적 보완이 이뤄졌고, 결국 ADR을 통한 해결방식이 정착됐다. 미국은 현재 연방정부는 물론 주정부, 시정부 등에서도 ADR방식의 갈등관리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은 조정성립률이 무려 67%까지 올라갔다.
박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국책사업으로 인한 갈등은 일단 벌어지면 사후적 수습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국가가 사전에 갈등을 예방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사전협의에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이해당사자 간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더 효율적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ADR 방식에는 한계도 있다. 무엇보다 이해당사자 간 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합리적 토론을 통한 합의도출이 어렵다. 또 대립구도가 '정부(또는 공기업) 대 주민'으로 단순하면 조정성립확률이 높지만, 요즘처럼 시민사회단체 개입이 많고 주민 간 이해관계까지 서로 다르면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더욱 요원해진다. 실제로 새만금간척사업,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경인운하,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밀양 송전탑까지 매번 찬반 양측이 추천한 전문가들로 민관위원회나 공동조사단이 구성됐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문가들조차 자기논리만 관철하려 하고, 불리해지면 '판'자체를 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점에서 프랑스의 '공공토론위원회(CNDP)'가 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CNDP는 중립성향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로,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정부는 국책사업 계획을 확정하기 전 CNDP에 회부하고, CNDP는 6~8개월간 공개적 의견수렴절차를 거친다. 온라인 의견청취도 있고 공청회도 수없이 개최되는데, 이렇게 모인 의견들은 보고서로 작성돼 최종사업계획에 반영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정부 때는 갈등관리기본법 제정과 함께 '갈등관리지원센터'를 설립하려 했고, 이명박정부 때는 사회통합위원회 산하에 '국가공론화위원회'라는 중립적인 갈등조정기구 구성을 검토했으나 모두 불발됐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제3의 기구를 통한 의견수렴과 사전적 갈등조정이 그 동안 의사결정을 독점해온 공무원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게다가 국회의원들도 갈등조정역할을 국회 고유 권한이라고 생각해 관련 입법에 미온적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정부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당시 국민대통합특위가 프랑스의 CNDP와 유사한 기능의 '국가공론화위원회' 설립을 건의한 바 있다. 정부도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해서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설치된 국민신문고(epeople.go.kr)를 통한 전자공공토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선 "노인들이 대부분인 밀양이나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온라인 토론에 참여하라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 발상"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엔 CNDP를 벤치마킹한 '국가공론위원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새누리당 김동완의원)과 '국책사업국민토론위원회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민주통합당 부좌현의원) 등이 발의되어 있지만 언제 통과될지 모르는 상태다. 정부도 국회도 여전히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제2의 천성산, 제2의 밀양사태를 막으려면, 갈등을 예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장은 "갈등관리도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한다. 각 부처 사안과 관련한 갈등예측도 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정책 권고도 할 수 있는 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강희경기자 k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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