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생 군인이었다. 육사 교정의 밤길을 '직각 보행'하던 생도는 임관 후에도 원칙을 고집해 '생도 3학년'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다. 부하들과 회식을 할 때면 애국가로 마무리를 하고 임지마다 이순신장군 영정을 걸어뒀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후배 군인들의 귀감으로 전해지고 있다.
군인정신으로 충일한 그가 자신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군 통수권자와 불화를 겪은 경력은 아이러니다.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11월 22일 불거진 '장성 진급 심사 비리' 사건의 타깃은 바로 그였다. 청와대 386 참모들의 인사 청탁을 거절하자 군 검찰이 나섰다는 게 정설로 번진 가운데 수사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국방부 주변에서는 권력의 입김을 거절한 채 인사 원칙을 고수했던 그가 억울할 수 있다는 동정론이 번졌다. 그는 한 차례 전역서 제출 파동을 거친 뒤 다음 해 초 임기를 마치고 군복을 벗었다.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걸어온 군인의 길은 한 마디로 정도(正道)였다. 군문(軍門)을 벗어나서도 절제된 행동은 이어져, 지난 3월 국정원장 취임식에서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 여러분도 전사의 각오를 다져달라"는 간결한 인사말을 남길 정도였다.
군과 정보기관 공히 보안을 최고로 중시하고 절제된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모총장 출신인 남 원장이 정보기관 수장으로 적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부시 정부와 오바마 정부가 공군 대장 출신인 마이클 헤이든과 야전사령관 출신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를 잇따라 CIA국장으로 임명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언론에서 남 원장의 모델로 조명했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11대(2002~2011) 국장 메이어 다간도 퇴역 군인 출신이다.
특히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군과 국정원이 대북 정보를 교차 확인해야 할 필요성까지 감안하면 군인 출신 국정원장은 더할 나위 없는 인선이다. 남 원장 스스로 인사 청문회에서 "군에서도 대북 정보를 취급하는 만큼 문외한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며 자격을 시비하는 야당의 공세를 방어한 바 있다.
그러나 취임 후 남 원장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함으로써 세계 언론으로부터 '기밀 누설자'라는 조롱을 받은 데 이어 지난 8일에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대북 정보를 무더기로 공개해 논란을 자초했다.
일부에서는 남 원장이 미확인 정보를 공개했다고 비판하지만 도리어 대부분 신선하지 못한 정보라는 점에서 공개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장거리 미사일 엔진 실험 등은 이미 외신을 통해 수시로 보도됐고 신형 다연장 로켓 전진 배치도 국내 언론에 간간이 노출된 사안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재보선을 앞두고 안보 불안을 부추기려는 의도'라는 야당의 지적에 오히려 눈길이 끌린다.
더 심각한 대목은 북한 동향을 포함한 기밀 사항을 대량 유포하면서 최소한 공개의 원칙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북 관계가 최악이던 이명박정부에서도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를 통해 북한 동향을 이처럼 대량 공개한 적은 없다. 물론 국정원장의 브리핑을 여과없이 발표한 새누리당 간사의 책임도 있지만 국정원장의 무절제를 우선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정국 최대 현안인 대화록 음원 공개에 대해 "여야 합의가 있으면 공개할 수 있다"고 한 발언도 신중치 못했다. '사초 실종 사건'은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 될 터인데 불필요한 발언으로 정쟁에 불을 붙이는 격이 돼 버렸다.
남 원장은 육군참모총장 퇴임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군인은 조국을 위해 충성하고 신명을 바치는 것이지,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도 스스로 '국가안보 수호와 국익증진의 사명'을 주창하고 있다. 남 원장이 노무현정부의 육군 수장이 아니었듯 박근혜정부의 정보 수장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서도 안되는 이유다.
김정곤 정치부 차장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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