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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이 전신마비의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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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이 전신마비의 계절에

입력
2013.10.10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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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좋은 계절이다. 구름 한 점 없거나 밝고 하얀 새털구름, 양떼 구름이 미동도 하지 않고 유유히 떠 있는 가을하늘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준다. 절로 우러러보게 되는 가을하늘은 맑아서 더 높고 높아서 더 맑다.

여름하늘을 호천(昊天)이라 하고 가을하늘을 민천(旻天)이라고 한다. 청민(?旻)은 맑은 가을이라는 말이다. 말을 하는 김에 좀 더 알아보면 하늘의 이름에도 사계가 있어 봄은 창천(蒼天), 여름은 호천, 가을은 민천, 겨울은 상천(上天)이라 부른다. 이것이 곧 사천(四天)이다. 지금은 바로 청민의 계절이다.

이 천고마비의 계절을 나는 흔히 전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해왔다. 가을이면 옷깃에 1.5cm쯤은 더 다가와 부는 바람이 감성을 자극하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이 늘 사람을 깨어 있게 한다. 가을은 봄이나 여름의 맨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 오히려 진하고 깊은 감각의 변화에 의해 심신이 마비될 듯 마음이 고단해진다.

이맘때인 가을 어느 날, 지금은 작고한 신문사 선배와 밥을 먹으면서 “전신마비...”운운했더니 그가 쿡쿡거리고 웃다가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몸을 숙여 그걸 주우면서 “삽을 새로 달라고 해야겠네요.” 그랬다. 그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다가 삽이 숟가락이라는 걸 알고는 더 크게 웃었다. 밥알이 막 튀어나왔다. ‘뭐가 우습지? 난 만날 이렇게 말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히려 내가 어리둥절해졌다.

정말이지 요즘은 심신이 고단하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노인성 수면습관이 붙은 건지 약속이 없는 날은 초저녁부터 졸려서 일찍 자고 새벽이면 깨곤 한다. 조침조기(早寢早起), 마치 새 나라의 어린이 같다. 어린이처럼 활기차게 뛰놀고 세상을 신기해하는 건 전혀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메일로 써 보내면서 “어제는 곤비하야 일찍 잤다”고 옛날 말투를 한번 써보았다. 곤비는 困憊, 곤할 곤 고달플 비...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을 만큼 지쳐서 몹시 고단하다는 뜻이다. 술을 좀 마시고 집에 들어와 10시도 되기 전에 잤던 날이다.

이 곤비라는 말을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책에선가 어디에선가 읽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그 말을 기억해낸 게 스스로 기특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 속에 담아둔 말은 그게 아니었다. “금일은 병의라...” 이게 내가 머릿속에서 다시 끄집어내고 싶어 했던 말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하는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내기를 한 송나라의 농부가 모가 좀처럼 자라지 않자 궁리 끝에 빨리 크라고 하나씩 뽑아서 늘려주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말하기를 “오늘은 피곤하구나. 내가 벼의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고 했다. 이른바 조장(助長),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지장(助之長)이라는 말의 유래다. 그 아들이 놀라 뛰어 가보니 당연히 다 말라 죽어 있었다.

여기 나오는 말이 바로 “今日(금일)은 病矣(병의)라.”였는데, 나는 “금일은 곤비하야”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곤비’와 ‘병의’는 충청도 말의 ‘대간하다’와 같은 뜻인 것 같다. ‘대간하다’는 몸이 지쳐서 느른하다, 고단하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그 많은 모를 뽑아 늘리자니 얼마나 힘이 들고 대간했겠는가.

자기는 잘 하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거지로 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손으로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실수(失手)는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이 전신마비의 계절에 두 손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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