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하나 안 하나 힘들긴 마찬가지지 뭐…"
서울 종로구 충신1 주택재개발 지역. 낙산성곽 비탈에 33㎡(10평) 안팎 낡은 주택들이 빽빽이 섰다. 기자가 충신동을 찾은 8일 박명옥(가명∙77) 할머니는 방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3층 집이 양편에 늘어선 골목은 우산 하나 겨우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할머니 집은 한낮에도 컴컴했다. 할머니는 거기서 50년을 살았다. 현관엔 벽마다 물을 흡수하려고 붙인 종이가 축축히 젖어 있었다. "집이 오래돼서 허리까지 물이 샌다"며 할머니는 손사래 쳤다.
충신동 일대는 곳곳이 빈집으로 방치돼 있고, 주민 상당수가 저소득 노인이라 범죄와 고독사 위험이 크다. 기자가 올 2월 충신동을 찾았을 때 들린 마을 어귀 가게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동네 주민은 매일 열던 슈퍼가 이틀이나 열지 않아 집으로 찾아가니 주인 할머니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마을에선 23일 재개발 사업시행인가 투표가 열린다. 지난해 투표에선 찬성표가 60%에 그쳐 사업시행에 실패했다. 할머니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할아버지가 노점을 열고 양말을 팔아 버는 돈은 월 30만원 남짓. 서울시는 3.3㎡당 1,457만원의 재개발 분담금이 필요하다는 실태조사 결과를 내놨다. 할머니가 가장 작은 46.2㎡(14평) 아파트에 들어가려 해도 4,000만원이 넘는 목돈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집 수리에도 지쳤다"면서 "재개발로 외지인들이 들어오면 집 팔고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찬성했다"고 말했다.
주거환경 개선이 시급하지만 충신1구역의 재개발사업은 좌초 직전이다. 7년간 사업이 지체되면서 찬성하던 사람들도 일부 반대로 돌아섰고 시공사도 2년 전부터 지원을 끊었다. 다음달이면 보증금을 모두 잃고 조합 사무실마저 문닫을 처지. 신종호 조합장은 "반대하는 사람 대부분이 저소득 고령층"이라면서 "열악한 지역이지만 돈이 없다니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오래된 주거지역 주민들의 고령화로 재정비사업이 지연되면서 재개발(주택가)∙재건축(아파트) 지역이 슬럼화 위기에 놓여 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서울 강북 산동네에 국한된 게 아니다. 당장 분당 등 1기 신도시 아파트가 올해로 지은 지 20년이 넘어간다. 2022년이면 전국 아파트의 3분의 1이 전면 개ㆍ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건설산업연구원이 서울 8개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을 조사한 결과, 실거주 조합원의 70% 이상이 50대 이상 인구였다. 재개발 사업장의 경우 50대 이상 인구비율이 77.4%에 달했고, 60대 이상도 절반(54.8%)이 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건축이 필요한 오래된 동네는 대부분 노인 가구주 비율이 높다.
대부분 노인 가구주는 개발 분담금을 낼 능력이 부족하다. 저성장 시대엔 과거처럼 집값 상승에 의존한 '한 푼도 안 내는 재개발'이 불가능하다. 당장 생활비가 아쉬운 노인들로선 가구당 최대 2억여원(서울 평균)에 달하는 분담금을 감당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엇갈린 해법을 내놨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노후 주거지역이 슬럼이 되기 전에 정부가 개인별 분담금까지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면 개인사업에 세금을 쓰려면 지원대상에게 의무를 부과하거나 간접지원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재필 서울대 교수는 "무리한 아파트 재건축 대신 리모델링 사업비를 지원하고 임대주택을 섞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도 "재개발은 사회적 갈등이 크니 인프라 중심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절충안도 있었다. 변창흠 세종대 교수는 "열악한 지역을 우선 지원하고 소유주에게 임대료 억제, 임대기간 보장 의무를 주는 방식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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