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으로 뻗은 1번 국도와 서해로 흘러가는 만경강이 교차하는 곳이 전북 완주군 삼례읍이다. 부러 찾아갈 일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아차, 전주 시내에서 호남고속도로 타러 가다가 실수로 전주IC를 지나쳐 버리면 그곳에 가게 된다. 삼례교 앞에서야 유턴이 가능하니까. 좌회전 신호 기다리며 서 있을 때, 왼쪽으로 한번 고개를 돌려 보기를. 특히 저녁노을 무렵이면. 정말 곱다. 비비낙안(飛飛落雁). 완산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풍경이다. 그 마을 얘기다.
"워-매, 가난가난 말도 못혀. 왜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자녀. 물고기나 잡아먹고 자갈이나 캐다 팔아서 겨우 연명하고 살았지."
행정동명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자연부락 이름은 비비정마을이다. 16세기 지은 비비정(飛飛亭)이라는 정자에서 따왔다. 노을에 물든 황금빛 강물에 황포돛대가 떠 있고, 잔풀 하나 없는 깨끗한 백사장엔 기러기떼의 그림자가 깃들던 곳이다. 글깨나 닦고 시깨나 쳤다는 도포짜리들의 옛 글에 이 마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배부른 자들의 얘기다. 금모래밭이 아무리 고와도 볍씨를 뿌릴 수는 없는 노릇. 스물 두 살에 이 마을로 시집 온 정도순(63) 할머니의 기억엔 그저 가난, 가난, 가난뿐이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우리 친정 엄니가 나 시집 보내고 나서 일주일 동안 뚝방 걸어서 맨날 이 마을로 왔었대. 나 데꼬 가불라고. 나가 자유결혼(연애결혼)했거든. 우리집은 그래도 농사마지기나 짓는 집이었는데, 시집은 영 외로운 집이었어라. 싸움 소리만 들리면 바로 데꼬 갈라는데, 일주일 내내 웃음소리만 들렸대. 그래서 지지리 궁상이지만, 이것도 지 팔잔 갑다 싶어 더는 안 왔대."
궁벽한 시골마을 중에서도 빈촌으로 꼽히던 이곳이 1, 2년 새 몰라보게 달라졌다. 시멘트 껍질 벗겨져 나간 자리에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진 건 요즘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니 더 얘기 말자. 작정하고 제대로 판을 벌였다. 돈은 이 마을을 '신문화공간 조성사업' 대상지로 선정한 정부가 댔다. 만경강의 유유한 흐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거기다 카페를 열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양수장 터, 거긴 농가 레스토랑이 됐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마을로 들어왔다. 그들이 양조장도 짓고, 청소년 대안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어릴 땐 전주 사는 친구들이 놀러 온다 그러면 핑계를 대서 못 오게 했어요. 여기 뭐 놀거리도 없고 좀… 그렇잖아요. 이젠 내가 먼저 가자고 그래요. 이 카페에 한번 와보면, 다들 깜짝 놀라거든요."
언덕 위 카페 '비비낙안'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마을에서 가장 어린 김경희(20)씨다. 대학교 2학년. 동네에서 누가 제일 잘 사냐고 물으니 "글쎄, 승태삼춘넨가… 아니다, 희소아저씨네 같아요" 한다. 왜일까. "저기요… 그 집엔 전에, 소도 한 마리 있었거든요." 그랬던 동네가 비비정마을인데 경희씨는 지금 스페셜티 커피를 내리고 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손님들이 만경강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바빴다. 아직 외지인들이 이 마을로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농가 레스토랑 '비비정'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다. 밥 한끼 먹으러 가보자.
"조미료는 뭣허러 쓴디야. 가깐 데서 나물이랑 캐와서 한 밥이니께 믿고 잡숴. 남은 건 다 내쏴야 하니께잉 남기지 말고."
레스토랑 비비정의 셰프는 세 명, 마을에 사시는 임정자, 최순덕, 정도순 할머니다. 세 분 나이를 합하면 213세. 성격이 꽤나 괄괄하셔서 마을에선 '건달 할머니들'로 불린다. 비료와 농약을 일절 안 쓰고 직접 키운 식자재로 옛날부터 마을에서 자시던 음식을 만들어 판다. 밥 먹고 있는데 강가에서 저절로 자란 호박을 막 따온 할머니가 레스토랑에 물건을 갖다 판다. 하나에 1,000원, 덤까지 18개에 1만 5,000원에 거래된다. 오리지널 친환경 로컬푸드. 밥에 나물 반찬, 따끈한 탕으로 구성된 시골 밥상이 1만 2,000원. 여기에 고기반찬과 찜 몇 가지 더 들어간 정식(예약필수)은 1만 5,000원이다. 살짝 비싼 듯.
"고것이 뭐이 비싸? 약 친 채소 쓰고, 홍어 대신 물홍어 쓰고, 우린 그란 짓 일절 안혀. 이 나이에 양심까지 팔아감서 장사해서 뭣 할라고? 잠자코 처묵어. 아따, 이놈이 점잖은 입에서 또 험한 소리 나게 해쌓네."
양조장은 문이 닫혀 있어 못 들어가봤다. 레스토랑 매니저 김기정(29)씨에 따르면 서울의 청소년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내려와 누룩을 딛고 고두밥을 찌고 있다. 단순히 술 만들어 파는 양조장이 아니라 전통 가양주를 빚는 법을 가르치는 공간이란다. 완주를 지날 일 있다면 이 마을에 들러보면 두루 뿌듯해질 듯. 반나절이면 족하다. 할머니들 차진 지청구 섞인 맛난 밥 먹고, 만경강 기러기떼를 굽어보며 차 한잔 한 뒤, 그윽한 술향기에 젖어드는 코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래도 비경이란 게 남아 있다면, 이렇게 오순도순 살아가는 마을의 모습이 거기 가까울 것이다.
[여행수첩]
●비비정마을을 찾아갈 땐 전주 시내에서 우석대 방향 3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전주IC에서 가깝다. 내비게이션에 '삼례읍 삼례리 768'(레스토랑 주소)을 입력. ●레스토랑 비비정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점심), 오후 5시30분부터 8시까지(저녁) 문을 연다. 월요일 휴무. 카페 비비낙안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마을 탐방 및 양조장 견학 등에 대한 문의는 사단법인 비비정 www.bibijeongin.com (063)291-8608
완주=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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