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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산에서 밀양까지 끊이지 않는 국책사업 갈등] <3> 뜨거웠던 현장 그후- 2: 방패장과 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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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산에서 밀양까지 끊이지 않는 국책사업 갈등] <3> 뜨거웠던 현장 그후- 2: 방패장과 부안

입력
2013.10.0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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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과정이었죠. 지금이라면 절대로 신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극한 내홍으로 유혈사태까지 빚어졌던 이른바 부안사태. 당시 갈등의 한복판에 서서 주민들로부터 폭행까지 당했고,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도 그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김종규 전 부안군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어찌되었든 주민들한테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비극은 2003년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변산반도로 유명한 부안 앞바다 위도주민들은 방폐장 유치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방사성쓰레기를 내 섬에 묻어 달라는 건 뜻밖의 요구였다.

여기엔 처절한 현실이 있었다.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인한 조류변화, 영광원전에서 흘러나오는 온배수 등으로 어획량이 급감, 위도는 더 이상 고기잡이가 힘든 형편이었다. 마침 그 무렵 방폐장 부지확보에 애를 먹던 정부는 방폐장을 받는 지역에 ▲양성자가속기사업 연계 ▲한국수력원자력 본사이전 ▲거액의 지원금 등 '선물보따리'를 안겨 주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위도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혐오시설유치의 '독배'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1,700여명의 섬주민 가운데 90% 이상이 방폐장 유치에 찬성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육지 쪽은 달랐다. 뭍에 사는 부안주민들은 절대로 방폐장을 못 받겠다고 결사반대를 외쳤다.

여기에도 나름 복잡한 현실이 있었다. 부안의 경제기반은 농ㆍ어업 위주로 되어 있는데, 방폐장이 들어서면 '부안산 농산물' '부안산 어패류'를 더 이상 팔 수 없고 결국 지역경제전체가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위도에선 주민중심의 '방폐장유치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육지에선 주민들과 환경ㆍ반핵단체 등이 연계된 '핵 폐기장 백지화ㆍ핵 발전소 추방 범 부안대책위원회(부안 대책위)'가 발족됐다.

팽팽한 긴장 위에 기름을 부은 건 지자체였다. 7월 초만해도 방폐장 유치의사가 없다던 김 군수가 돌연 유치신청을 선언한 것. 김 군수의 말 바꾸기에 배신감을 느낀 주민들은 부안읍내에 모여 매일 반대집회를 열었다. 중심가인 부안터미널 사거리는 2만여명의 시민들로 들어찼고 경찰병력 1만2,000여명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김 군수는 감금ㆍ폭행을 당했고, 4개 학교가 등교를 거부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과잉진입으로 주민 500여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 속에 110여명이 사법 처리됐다.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위도(유치찬성)와 읍내(유치반대)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유치를 주장했던 서하석(59) 위도면 대리마을 이장은 "지금도 유치에 반대했던 육지주민들에게 화가 난다. 방사성폐기물은 어차피 바닷길을 통해 운반되기 때문에 읍내를 통과하지도 않는데 육지주민들은 끝까지 반대만 외쳤다"고 말했다.

반면 당시 유치반대투쟁을 벌이다 징역 2년6개월(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던 이영구(52)씨는 "위도든 읍내든 외지사람들 눈에는 다 부안이다. 방폐장이 있는 부안산 농수산물을 대체 누가 사먹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지금도 술자리에서 찬성론자들을 발견하면 자리를 옮긴다"고 말했다.

하나의 방폐장을 두고 위도는 지역경제회생으로, 육지쪽은 지역경제파괴로 봤다. 어느 것이 진실일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이렇게 다른 주민들의 생각을 사전에 충분히 묻지도 않은 채 지자체가 덜커덕 유치추진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김 전 군수도 "주민들의 의견수렴 과정부터 거쳤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더 이상 대화나 타협은 불가능했다. 결국 부안 방폐장 유치는 주민들의 자체투표 결과 91.8%의 압도적 반대로 무산됐다. 만약 이런 주민투표를 먼저 실시했다면, 결과여부를 떠나 적어도 부안이 갈갈이 찢어지고 피까지 보는 극한 갈등을 피했을 것이란 게 현지 주민들의 지적이다. 이후 2005년 제정된 방폐장유치지역지원 특별법에는 주민투표가 포함됐으며, 결국 가장 많은 찬성표가 나온 경북 경주시(89.5%)가 방폐장 부지로 최종 선정됐다.

인구 7만의 부안은 10년이 흘렀어도 '방폐장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서로 말도 섞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세대 갈등이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된다는 얘기도 들린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끊임없는 말 바꾸기와 공권력을 앞세운 과잉진압, 갈등조정과정에서 보여준 무능함 등 부안사태의 일차적 책임은 정부와 지자체에 있었다"고 말했다.

부안=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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