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 한푼 더 받아보려고 애써 모은 목돈을 이름부터 위화감이 드는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옮긴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하필 동양증권의 CMA로. 계좌를 튼 지 얼마 후 전문가의 어투가 묻어나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이자가 낮은 CMA에 왜 목돈을 묻어두십니까? 원금 보장이 되고, 만기 3개월에 금리가 연 6~7%나 되는 상품이 있습니다." 그 상품 이름 역시 기억하기 쉽지 않은 '특정금전신탁'이었다. "든든한 동양시멘트가 담보를 선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에 투자하는 상품이라 돈 떼일 염려가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래도 미심쩍어 우선 1,000만원만 넣었다. 이후 이자 받는 재미에 조금씩 투자규모가 늘어났다. 그러다 추석 연휴 직전 동양그룹이 위험하다는 소문에 동양증권 담당자에게 문의했다. 대답은 "설마 3개월 안에 돈을 떼이겠습니까? 일부 계열사가 자금난을 겪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알짜 동양매직과 동양시멘트 발전소 등을 팔면 해결될 것이니 걱정마세요"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동양그룹에 돈을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이 5만명에 달한다. 일부에서 이들을 고수익에 눈이 먼 부주의한 투자자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 것은 높은 이자의 유혹 보다 CMA, ABCP, 특정금전신탁 같은 금융전문용어였다. 동양증권 직원들이 이런 용어를 섞어 가며 "원금 떼일 염려 없고 이자도 높은 상품"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직원이 형광펜으로 표시한 계약서 빈칸에 서명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시장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제약요인 중 '정보의 비대칭성'이 있다. 쉽게 풀면 정보를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흥정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 주머닛돈을 힘으로 빼앗는 것처럼 불공정한 거래란 것이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특히 문제가 되는 곳이 금융시장이다. 이런 이유에서 금융회사로부터 일반 시민을 보호하는 것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다. 그러나 이번 동양 사태에서도 금융당국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특히 동양 사태는 오래 전부터 재탕 삼탕 돼온 '교과서적 금융사고'라는 점에서 금융당국의 책임이 더 크다. 우선 산업자본이 계열 금융사를 동원해 자금을 모집하는 것은 금산분리라는 금융시스템 기본 원칙을 무너뜨린 것이다. 금융당국은 동양증권이 부실 계열사 채권을 개인투자자에게 집중적으로 팔고 있는 것을 2011년 11월 확인했으나, 1년이 지난 지난해 9월에야 규제에 나섰다. 제재할 규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금융투자업 규정 개정안이 마련됐고, 그 규정이 통과된 것은 이미 동양그룹 유동성 위기가 심각해진 올해 4월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동양이 구조조정을 통해 CP를 상환하라"며 6개월 유예기간을 주었다.
이 운명의 6개월 동안 동양은 CP를 상환하기는커녕 7월과 9월 두 차례 1,569억원 규모의 ABCP를 추가 발행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동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사람들에게 폭탄을 다른 투자자에게 떠 넘기고 안전하게 탈출하는 기회가 됐다. 금융당국의 6개월 유예조치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극대화되는 기간이었을 뿐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기는커녕 피해만 키운 꼴이 됐다.
뒤늦게 '모르는 게 죄'가 돼 알토란 같은 돈을 날리게 된 동양그룹 개미 피해자들이 거대 기업의 기만과 금융당국의 태만에 맞서기 위해 속속 뭉치고 있다. 동양그룹채권자비상대책위원회(가칭)는 법정관리를 신청한 5개 동양 계열사 개인투자자들의 채권을 모아 채권자협의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또 법정관리인에 경영진 측 인사가 아니라 개인 채권자들의 이해도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시도가 금융사고가 터지면 늘 정보가 부족한 개인들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금융시스템의 문제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며 응원을 보낸다.
정영오 경제부장 young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