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8월 말 김명순(74ㆍ가명)씨는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캠프 험프리 건너편 골목길의 단칸방 침대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햇볕에 달궈진 슬레이트 지붕에 창문도 없어 방 안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펄펄 끓었다.
"돈 없고 병까지 걸린 양공주(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가 갈 곳이 어디 있겠냐." 김씨는 "그나마 여기서도 내쫓길 처지다"며 한숨 지었다. 2007년 말 미군기지 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지역에 불어 닥친 개발 열풍 때문이다.
김씨는 20대 중반부터 경기 동두천, 서울 용산 등 미군기지 주변을 전전한 이른바 '기지촌 여성'이다. 7일 기지촌 할머니들을 돕는 햇살사회복지회에 따르면 안정리에 거주하는 기지촌 여성은 70여명이다. 캠프 험프리 앞에서 줄곧 산 이들도 있지만 다른 지역 기지촌에서 옮겨 온 경우도 많다. 김씨는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우리끼리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데가 여기 말고는 없다"고 말했다. 뇌경색, 척추관 협착증 등을 앓고 있는 김씨처럼 이곳 할머니들은 순탄치 않았던 세월 탓에 대부분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들이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단칸방들이 미군기지 확장으로 달아오른 부동산 개발 여파에 족족 헐려 나가고 있다. 대신 번듯한 렌트 하우스가 새로 들어섰다. 월세 10만원 안쪽에 난방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연탄 보일러 방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이제 더 찾아볼 수도 없게 됐다. 현지 부동산 업체들은 "비좁은 방 한 칸도 최소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0만원 이상"이라고 말했다. 할머니 3명 중 1명은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월 40여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도 받지 못해 방값을 감당하기 어렵다. 1960~70년대 '달러벌이의 역군'으로 국가가 앞장서 미화하던 이들은 곧 닥칠 겨울 한파 걱정에 한숨이 더 깊어지고 있다.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상처를 받았어도 익숙한 곳 또한 미군기지라 할머니들이 안정리에 모였지만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국가의 묵인 하에 한 평생 고생한 이들이 철저하게 외면 당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건 2006년 5월 미군기지 확장에 온 몸으로 맞섰던 인근 대추리도 마찬가지다. 대추리 주민 44가구는 여전히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팽성읍 노와리의 이주단지 '평화마을 대추리'에 모여 살고 있다. 전원주택 풍의 번듯한 집들이 늘어선 모습에 외지인들은 "이 정도면 살 만하겠다"고 무심코 내뱉지만 그 한 마디가 주민들에게는 비수가 돼 꽂힌다. 수십 년간 피땀 흘려 개간한 농지를 미군에 내주고 쥐꼬리만한 토지보상금에 자비를 털어 지은 집들이다. 일부는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기도 했다. 그나마 살 곳은 만들었지만 천직으로 삼았던 농사를 지을 땅은 한 뼘도 없다.
올해 초 대추리 자체조사 결과 주민 112명 중 3분의 1 가까운 35명은 정부 일자리사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 대출을 받아 외지에 싼 땅이라도 구해 농사를 짓는 집은 두 가구에 불과하다. 신종원 대추리 이장은 "정부 일자리사업이 다음달로 끝나는 게 두렵다"며 "주민들은 내년부터 고정 소득원이 없어졌을 때 과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버티다 못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평택=김창훈기자 chkim@hk.co.kr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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