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정부사업을 반대하는 작은 아버지는 나와 피가 다른 사람'이란 말을 했을 땐 충격 때문에 밤잠을 못 잤습니다. 친지들이 이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어요."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 어귀에서 만난 강모(81) 노인은 해군기지 건설사업 이후 둘로 쪼개진 마을 현실에 피눈물이 난다고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한 눈에 봐도 마을은 갈라져 있었다. 노란 깃발이 달린 집과 그렇지 않은 집. '해군기지 결사반대' '생명평화 강정마을' 등 문구가 적힌 이 깃발의 유무로 어느 집이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집인지, 찬성하는 집인지 알 수 있었다. 한 주민은 "노란 깃발이 없는 집은 찬성하는 집"이라고 일러줬다. 입장을 달리하는 각 주민들을 아예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다닌다고 했다.
평화로웠던 제주 해안마을에 비극이 시작된 건 2007년 해군기지건설이 추진되면서부터다. 남방해역 안보를 위해 해군기지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된 1993년 이래, 후보지를 찾아오던 정부는 강정마을을 낙점했다. 여기에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소수만이 참가한 여론조사를 근거로, 제주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강정마을을 선정했다.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삶의 터전에 군사기지가 들어온다는데, 그 흔한 설명회도 변변히 열린 적이 없었다. 당시 마을주민 90%가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군은 2010년 4월부터 공사를 강행했다. 이후 종교계, 환경ㆍ인권ㆍ반전단체 등이 가세했고, 작년에는 강정마을의 상징이던 구럼비 바위 발파를 놓고 극한 대치가 빚어지기도 했다.
정부와 군의 입장은 명확하다. 일반 국책사업이 아니라 국가안보 사안인 만큼 주민들이 양해해줘야 한다는 것. 대신 험악한 군사기지가 아닌, 크루즈선도 접안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조성하는 만큼 지역경제에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는 논리였다. 실제로 "이젠 실익을 따져야 할 때"라며 찬성입장을 견지한 주민들도 있다.
현재 해군기지 건설은 50%가량 진척된 상태. 주민들이 낸 해군기지건설승인 무효소송에서도 군이 1, 2심을 뒤집고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쳐 최종 승소함에 따라, '적법성'도 확보됐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주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건설 자체를 반대하고 있지만 솔직히 처음으로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온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갈등이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당국은 강경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국방부는 지난 8월 해군기지 관사 건설사업을 일방적으로 공고했고, 앞서 제주도는 행정대집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안보논리와 적법성 만을 내세워 정부와 군 당국이 그냥 '고(go)'만 외치는 건 무책임하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강정마을 사람들도 엄연한 국민인데, 그 상처가 너무 깊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실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공동체가 붕괴됐다. 단적인 예로, 강정마을엔 주민들끼리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품앗이를 해주던 200여개의 향약 노동공동체 '수누름 농장'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 조차 완전 파괴됐다. 한 주민은 "서로 외면하다 보니 농번기 일손이 부족할 정도"라고 말했다.
게다가 주민 상당수는 전과자가 됐다. 2007년 4월부터 지난해까지 해군기지에 반대하다 체포된 주민과 활동가수는 총 649명에 달하고, 작년 구럼비 사태 때는 무려 300명이 입건됐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군 당국이 진정성을 갖고 강정마을에 다가가, 국책사업에 대한 신뢰 회복은 물론 파괴된 공동체 복원에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형준 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연구교수는 "국민적 이익 앞에 지역주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도 큰 만큼 정부는 이제라도 지난 절차적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함께 합리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합리적 수준의 보상법 등 사회적 시스템 마련 역시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강정마을에 대한 보상체계가 사업추진 초반에 제대로 가동됐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해녀와 어선 선주들에게만 '어업권'이란 이름으로 소수보상이 이뤄졌을 뿐, 나머지 주민들은 보상근거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사업찬성을 전제로 마을회관 건설 계획 등을 밝힌 정도가 전부였다.
강영진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은 "우리사회 갈등이 과거 노사관계 등에서 환경 인권문제 등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후진적 대응을 하고 있다"며 "지역주민의 의사를 제대로 묻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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