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새로운 양식은 사상가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조선 왕조 후기,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이 화폭에 한껏 펼쳐졌던 진경산수화 역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발전시킨 조선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주자 성리학에서 한 발 더 나간 조선 성리학은 우리 문화계에 유례없는 자부심을 심어줬고 겸재 정선은 이를 토대로 우리의 삶과 자연을 그대로 묘사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완성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뒤를 따른 화원 화가들의 그림이다. 궁에 소속된 직업 화가인 이들은 당대의 화풍을 활용해 왕실의 권위와 통치 이념을 시각화하는 것이 주 임무다. 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사상을 그림에 반영하다 보니 아무래도 원조인 사대부 화가들의 그림과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매번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고충이다.
간송미술관이 13일부터 27일까지 여는 '진경시대 화원전'에서는 당시 최고의 그림쟁이인 왕실 화가들이 당대 사조를 받아들였던 흔적과 그 과정에서 부딪힌 한계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단원 김홍도다. 겸재를 계승해 진경풍속화풍의 대미를 장식한 단원은 중국의 신선인 동방삭을 그리면서 이마가 길쭉한 중국풍 신선 대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묘사했다. 우리가 세계 문화의 주역이라는 문화적 자부심이 한껏 표현돼 있다. 그러나 금강산 구룡폭포를 그릴 때는 왕실 화가의 한계를 드러낸다. 뒤 배경을 없애 폭포의 통활한 느낌을 살린 겸재와 달리, 금강산에 가지 못하는 정조를 위해 뒷산까지 꼼꼼히 묘사한 단원의 그림은 사대부 화가와 화원 화가의 근본적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림에 열정이 대단했던 정조는 단원을 늘 가까이 두었는데 그러다 보니 단원이 스스로를 화가가 아닌 사대부로 여긴 듯한 그림도 눈에 띈다. 군자의 상징인 사대부를 그린 '신죽함로'는, 그러나 문인치고는 기교가 너무나 뛰어나 오히려 격조가 없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전시에는 단원 외에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 불염재 김희겸 등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화원 화가들의 작품 100여점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8월 22일 간송미술문화재단 출범 후 처음 여는 전시다. 간송미술관은 재단 출범을 계기로 서울시디자인재단과 협력해 내년 3월 개관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다양한 전시를 열 계획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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