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쯤 베란다 벽에 책장을 짰다. 방에 마루에 자꾸 쌓여가는 책을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던 시점이었다. 신경을 써서 정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략 손 닿는 대로 꽂다 보니 새로 들인 따끈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새 책장에 꽂힌 새 책들의 책등이 알록달록 환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집안 곳곳을 걸레질하다가 그 책장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십여 년은 족히 묵은 것처럼 빨강도 파랑도 검정도 몰라보게 바래 있었다. 햇빛과 바람이 잘 드는 자리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래도 새삼 놀랍다. 햇빛은 이 색깔들을 전부 어디로 거둬들이는 것일까. 책만 그런 게 아니다. 김칫국물이 밴 도마를 햇빛 좋은 자리에 내다 놓으면 금세 원래의 나무색으로 돌아간다. 흰옷에 묻은 커피얼룩도 표백제보다 햇빛이 더 잘 지워준다.
햇빛은 생물과 사물을 분별한다. 생물은 햇빛 속에서 색을 얻고 사물은 햇빛 속에서 색을 잃는다. 사람의 살갗은 검어지고 나무의 잎사귀는 청청했다가 붉어지며, 숨을 쉬지 않는 모든 것들의 색깔은 나날이 희미해져 간다. 과학적 원리를 따질 수 있다 해도, 햇빛에 닿은 이 세계의 짙거나 옅은 색들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신비롭지 않은 건 아니다. "눈이 녹으면 하얀 색은 어디로 갈까."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이 질문을 다시금 되새긴다. 색이랄 수도 없는 하얀 색마저, 햇빛은 정녕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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