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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에서 밀양까지 끊이지 않는 국책사업 갈등] <1> 밀양 송전탑, 돌고돌아 원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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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에서 밀양까지 끊이지 않는 국책사업 갈등] <1> 밀양 송전탑, 돌고돌아 원점으로

입력
2013.10.0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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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논의 '틀' 구태의연한전, 이장들과 보상 협의… 선로 인근 주민들 상대했어야8년 간 허송세월"재임 중 시끄러운 일 피하자" 역대 한전 사장들 책임 방기

"애초에 우리 의견은 묻지도 않았어. 그러고는 공사하다 멈추고, 또 시작했다가 중단하고… 우리가 안 죽으면 끝이 안 나니 목숨을 던지는 거야."

공사 재개를 하루 앞둔 지난 1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765㎸ 고압 송전탑 공사현장에서 만난 한옥순(66)씨는 울분을 토했다. 전국 곳곳에 그렇게 많은 게 송전탑인데, 대체 이곳 노인들은 무엇에 이토록 화가 난 것일까. 그 갈등의 시작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력은 그 해 8월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 주민설명회를 처음 개최했다. 하지만 내 머리위로 고압 전기가 지나가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반대여론이 조성됐고, 2006년엔 주민반대 대책위원회까지 꾸려졌다.

대부분 국책사업은 일단 '강행모드'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반발이 거세지면 '대화모드'로 바뀐다. 송전탑도 그랬다. 2007년 11월 정부는 사업을 승인했고, 한전은 2008년 8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이후 대규모 반대집회가 이어지고 도저히 진행이 힘들어지자 그 때서야 본격 협상테이블이 마련됐다. 하지만 합의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한전의 계속된 설득에 2011년 10월 송전선로가 통과하는 밀양 내 5개면 중 청도면은 보상안에 합의했다. 하지만 단장 상동 부북 산외 등 나머지 4개 면은 백지화 또는 송전선 지중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해 1월 송전탑 반대를 외치던 칠순의 노인(이치우씨ㆍ당시 74세)이 분신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평행선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5월 국회가 나서 전문가협의체를 구성, 대안을 찾았지만 이조차 파행운영으로 '반쪽'보고서를 내는 데 그쳤다. 정부와 한전은 더 이상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조환익 한전사장의 사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의 방문, 그리고 최종적으로 개별보상안 보따리를 든 정홍원 국무총리의 현장방문이 이어졌다. 공사재개를 위한 최종 수순밟기였다. 하지만 반대주민들은 거부했고, 한전은 공사중단 126일 만인 지난 2일 삼엄한 경찰경비 속에 다시 삽을 들었다.

지금까지 양측이 머리를 맞댄 횟수는 공식회의만 77차례. 비공식 협상테이블까지 합하면 1,500회가 넘는다. 공사 재개와 중단도 11차례나 반복됐다. 하지만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부든 한전이든 반대측이든 사태가 꼬여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쪽은 없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사업주체, 즉 한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시종 관행과 타성에 젖은 낡은 '매뉴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유사 사례를 많이 겪어 본 한전은 '지역에선 으레 반대한다' '결국은 시간과 돈으로 풀린다'는 전제 하에 '소통' 없이 송전탑 건설을 시도했다. 일방적으로 선로노선을 확정, 국책사업이라는 점을 내세워 밀어붙이려 했던 것이다. 갈등조정과정에 참여했던 이강원 경실련 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주민설명회에는 고작 100여명 정도만 참석했을 정도도 의견수렴이 미비했다"면서 '선(先) 공사승인, 후(後) 주민대응' 관행이 근본원인이라고 꼬집었다.

협상논의의 틀도 구태의연했다. 한전은 각 마을 이장단과 보상문제를 협의했는데, 이런 경우 선로인근에 사는 주민들을 직접 상대했어야 마땅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한전은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들과만 보상논의를 하고 진짜 이해당사자들은 배제했다"며 "그저 공사를 빨리 진행하기에 쉬운 쪽으로 논의를 끌고 간 편의주의적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역대 한전 사장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피해가려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밀양사정에 밝은 한 전직 고위관료는 "훨씬 적은 비용(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몇 백억원을 쏟아 부어도 어렵게 됐다. 정부도 한전에만 맡긴 책임이 있지만 재임 중 시끄러운 일을 피하려는 경영진의 태도가 사태를 키웠다"고 말했다.

밀양=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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