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웅덩이에 빠지는 사고로 뇌병변 장애를 얻어 10년째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생, 동생의 병원비를 대느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기운 집안,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와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대학에 들어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노희진(24)씨.
1일 서울 신촌 연세대 교정에서 만난 노씨는 행복해 보였다. 2년 9개월여 사이 가정 형편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되겠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학교 영문학과 4학년인 노씨는 "지난 학기 수업을 통해 교육 봉사활동을 접하면서 인생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저소득층 고1 남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 아이가 한껏 풀이 죽어 '고등학생들이 왜 자살하는지 알겠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노력하는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아이에게 딱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살아온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노씨는 자신의 과거를 학생에게 털어놨다. 평소엔 입 밖에 잘 내지 않던 얘기였지만 왠지 술술 나왔다. 자신의 형편과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달린 이야기까지. 봉사활동이 끝나고 7월쯤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하위권에서 맴돌던 성적이 전교 20위권까지 올랐단다. "보람찼죠. 내가 용기를 내니까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내 삶도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노씨의 사연은 한국일보 보도 전 방송과 신문을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민감하던 사춘기 시절 감추고 싶었던 비밀이 노출돼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 월세, 가족의 병원비, 생활비 일부 등을 후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만했죠. 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현실이 버거워 도움을 청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용기 있는 거라고요."
노씨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미국 뉴욕으로 연수도 다녀왔다. 후원재단이 그의 꿈을 위해 후원자를 섭외하는 등 동분서주한 덕분이다. 지금은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지만 노씨의 오랜 꿈은 뮤지컬 배우였다. 그가 영문과를 선택한 것도 언젠가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공연을 봤을 때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어요. 필름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작은 무대에 서기도 했죠." 노씨는 "도움을 준 분들에게 이번 기회를 빌려 꼭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씨는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야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노씨는 말했다. 긍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상황을 불러온다는 믿음에서다.
노씨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남본부 연락처(061-753-5129)를 꼭 넣어 달라고 했다. 더 많은 아이들에게 꿈을 길어내는 마중물을 선사하고 싶어서다. "돈이 없어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친구들을 꼭 후원할 겁니다. 작은 후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제가 직접 겪어봤잖아요."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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