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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심경호의 <내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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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심경호의 <내면기행>

입력
2013.10.0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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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멀다. 이 말은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과 나 사이에 놓인 시공이 아득히 넓다기보다, 종국엔 나와 합화(合和)할 수밖에 없는 그 만유의 원리를 내가 외면하고 있다는 말에 가깝다. 만 사람의 죽음을 다 '슬프다' 하면서, 유독 나의 죽음만 '두렵다' 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스라친다. 긴 우주의 시간 속에 내 삶이 찰나와 같다는 사실, 죽음은 바로 문지방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될 때면. 누군가 삶의 복판에서 늘 죽음을 직지(直指)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하다.

은 그러한 직지의 풍경화다.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고려와 조선 선비들의 자지(自誌), 자명(自銘), 자표(自表), 만시(晩時) 등을 한글로 풀어 책으로 묶었다.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 죽은 뒤 자신의 묘비에 새기거나 함께 묻어달라고 지은 글이다. 책 속엔 약 700년의 세월이 죽음과 죽음, 아니 그 죽음 이전의 불꽃과 같았던 삶과 삶의 풍경으로 이어져 있다. 죽음을 응시하고 있는 자의 통절한 슬픔, 고독, 그리고 덧없음이 이 풍경화의 원근을 깊게 하고, 채도를 두텁게 한다.

이 책은 2009년 9월에 발간됐다. 전직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죽음이, 죽으면서 남기는 글의 존재감이 사회에 두루 묵직했던 때다. 처음 읽었을 때, 그래서 비장함이 제일 먼저 눈에 들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 문인 남효은(1454~1492)의 자만(自挽ㆍ스스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남효은의 삶은 의기 만만하고 분방했다. 스물다섯 되던 해, 소릉(단종 생모의 능)을 복위시킬 것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다. 꿈과 현실은 종내 어긋버긋했다. 그는 서른아홉에 세상을 버렸다.

"…생전에는 입 벌려 웃더니, 죽은 뒤에 누가 이 즐거움 아울러 지닐까. 다만 한스럽기는는 세상 살았을 적, 끔찍하게 여섯 액운이 모였던 일. 용모가 추해서 여색을 가까이 못한 것, 집이 가난해서 술 충분히 못 마신 것, 행실이 더러워 미친놈 소리를 들은 것, 허리 곧아서 높은 분 화나게 한 것, 신이 뚫어져 뒤꿈치가 돌에 닿은 것, 집이 낮아 이마가 대들보에 부딪힌 것…"(387쪽)

장엄한 센티멘털리즘에 젖고 싶어 다시 이 책을 꺼낸 건 아니다. 굳이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죽음이라는 완결의 형식에 몇 걸음 더 다가서게 된 내게, 늘 외면하고 있는 죽음과 이제 눈을 맞춰봐야 하겠다는 어떤 깨달음, 그것 비스무리한 것이 찾아왔다고 해야겠다. 이런 조락의 계절에 심 교수가 서문에 쓴 아래와 같은 글은 가슴 깊이 사무쳐 든다. 그걸 알게 된 나이가 된 것이다.

"나의 가장 외부에 있으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완결시키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어쩌면 죽음 자체는 내 외부의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죽음에 의해 일단 완결된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알 수 없을 것이기에 그 점이 두렵다."

유교의 자장 속에 있던 선비들의 정신엔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념이 박약했다. 그래서 살아서 자기의 묘표나 묘지를 쓰는 일은, 아마도 죽음이 가져올 존재의 무화(無化)를 극복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죽음을 징험(徵驗)한 자의 성찰과 달관, 회환이 배어 있다. 더러는 일생의 추구한 바를 온축해 남기려는 에너지가 응결돼 있다. 어떠한 도그마에도 신령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살아온 삶으로써 스스로의 죽음을 극복해 내려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을 몇 줄의 글로 새기는 목소리가 그저 담박하다는 사실 앞에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 언젠가 만나게 될 내 삶의 풍경에 대해 사색하게 만드는 책.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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