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한 점 없는 산길. 대리기사는 길을 잃어 오도 가도 못한다. 주머니에 잡히는 것이라곤 조금 전 손님이 던지고 간 1만 5,000원과 담배 반 갑, 그리고 라이터가 전부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 대리기사는 해고당한 전직 영업사원, 그리고 유에프오를 찾아 다니는 기이한 청년을 만나 함께 밤을 보낸다. 각박하고 우울해 눈물마저 짜낼 것 같은 이야기. 궁지에 몰려 바둥바둥하는 현대인을 꼬집는 스토리건만 어찌 된 일인지 막이 오른 내내 관객은 배를 잡고 웃는다.
슬픈 코미디, 인생은 어차피 고락의 연속이니 울다가 웃기라도 하자는 걸까.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 '김 사장의 전투' 등에서 노동자의 아픈 삶을 유머로 얘기하는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을 끊임 없이(통산 73편) 쓰고 무대에 올려 주목을 받아온 오세혁(32). 그가 동인극단 '자전거날다'의 창단 공연으로 13일까지 서울 동숭무대에서 올리는 연극 '우주인-더 그레이트 맨' 역시 '슬프도록 웃기는'작품이다. 한 해(2011년)에 두 개의 희곡이 각각 다른 신문사 신춘문예에 뽑힌 후 곧이어 제11회 밀양연극제 대상을 받아 단숨에 연극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오세혁은 '우주인'의 무대 뒤에서도 일흔 네 번째의 '웃기도록 슬픈' 작품 구상을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osenose) 아이디를 '오플린'으로 할 정도로 오세혁의 롤 모델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었다. 아픈 이야기,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코미디로 풀고자 하는 그의 연극은 채플린에서 비롯했다. "어린 시절 홀로 TV를 보다 채플린의 영화에 완전히 꽂혔어요. 불우하고 절망적인 삶을 어떻게 이토록 웃기고 슬픈 코미디로 만들 수 있을까. 슬픔을 슬프게 표현하면 슬퍼 보이지 않는다는 진실을 그때 깨달았죠."
오씨의 작품은 채플린의 영화가 그랬듯 코믹하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꾸짖고 변혁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무겁게 실려 있다. "저도 겁이 많은 사람이고 모두가 그렇듯 보통 사람입니다. 제 공연을 보면서,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를 한 번쯤 생각하고 그냥 만원 정도 후원하는 용기를 관객들이 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매카시즘에 쫓기던 채플린이 꿈 속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제강점기 우리나라로 날아와 만담가 신불출을 만나는 이야기로 레드 콤플렉스를 비꼬거나(연극 '레드 채플린'), 옷장 속 옷을 매개로 노동의 문제를 재치 있게 건드리는(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 등 오씨는 웃음과 페이소스를 절묘하게 구사하는 연극계 아이디어 뱅크다. "기발한 상상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무리 기똥차도 결국 누구나 그 정도 상상은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죠. 영화 '매트릭스 2'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카피 때문이 아니었나요. 상상에 의지하기보다 관찰과 메모의 힘을 믿습니다. 연락처를 정리할 때 사람들의 특성을 함께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요. 연극 '우주인'도 대리기사를 하는 선배가 실제로 길을 잃고 그곳에서 다른 대리기사들을 만났던 일을 극화한 작품이죠."
밀양연극제 대상을 받기까지 7년 여 동안 오세혁은 자신이 만든 마당극 단체인 '걸판'안에서 주로 활동했다. "사람만 착해 보이면 연기력이 있건 없건 바로 다음날 무대에 올린다"는 괴상한 극단 운영 방침과 "모든 배우의 작가화"라는 기치를 세운 오씨는 일 벌이기를 무척 좋아한다. '우주인'개막 전날도 동료 작가들과 벌이고 있는 '카페 10분 연극'을 수행하고 돌아왔을 정도다. "연극 '레드 채플린'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조만간 작가 몇 명과 모여 청소년들을 위한 희곡집을 쓰려고 해요. 물론 '걸판'활동도 동시에 하면서요. 마흔이 넘으면 드라마, 그 중에서 사극을 쓰고 싶다는 계획도 있어요. 그때까지는 연극, 특히 '걸판'에 주력하려고 하죠"
그가 다음 '판'에선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연출보다 배우로 무대에 설 때 사는 맛이 난다"는 오세혁 연극 인생의 향배를 알 길은 없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김주영기자 wil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