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총리ㆍ책임장관제를 실현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약속이 집권 7개월 만에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초연금 공약 후퇴 과정에서 항명사태까지 일으키며 자진 사퇴한 게 결정적 방증이다. 이로써 각 부처 장관이 예산ㆍ인사ㆍ조직 등의 전권을 갖고 그 결과도 책임지게 한다던 당초 취지는 무색해졌다는 비판이 힘을 얻는 모양새다. 책임장관의 실종은 청와대 중심의 일방적 국정운영에 따라 폐쇄성이 강화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다원화하고 입체적인 국정과제를 구현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지적이다. 내각과 청와대 수석간의 정상적 소통이나 역할 분담이 왜곡되면서 국정운영의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것이다.
청와대 입김에 정책ㆍ인사 오락가락 일쑤
우선 청와대 입김에 정부의 정책방향이나 인사가 뒤틀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교육부에선 '한국사 수능 필수'논란과 관련, 7월 초까지만 해도"국어 수학 영어까지 모든 영역이 선택인 수능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한다는 것은 수능체제와 맞지 않고, 사회 과목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며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10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논설실장과의 간담회에서 "수능으로 딱 들어가면 깨끗하게 끝나는 일"이라고 밝히면서 방향이 급선회했다.
지난 25일 군 대장급 수뇌부 인사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청와대에 제청한 합참의장 1순위는 조정환(육사33기) 전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청와대가 이를 뒤집어 최윤희 전 해군참모총장을 합참의장으로 전격 발탁하면서 장관의 체통이 우습게 됐다는 지적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사전 물밑 조율로 모양새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나흘 만에 바뀐 세법개정안은 상징적 사례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내년도 세법개정안 발표 후 반발이 거셌으나 올바른 방향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사흘 뒤 박 대통령이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언급하자 현오석 기재부 장관은 곧바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 수정안을 내놓았다. 기재부는 내년 예산안도 당초 350조원 이내의 긴축기조로 판단했지만 '4% 성장률에 맞춰 짜라'는 청와대 주문으로 결국 누더기 식 예산안을 내놓았다.
청와대 눈치만 보는 부처들
담당 부처가 의사결정을 제대로 못하고 청와대 눈치보기에 급급한 사례도 적지 않다. 소신을 갖고 현안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말도 나온다.
지난 6월 초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이 민주노총 방문 당시 김중남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 위원장에게 '이행사항을 지킬 경우 설립신고를 받아주겠다'고 확인하고, 7월25일 고용부는 전공노 설립신고 관련 기자설명회를 개최키로 예고했다. 사실상 설립신고 필증을 내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설명회는 2시간여를 앞두고 '추가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돌연 연기됐다. 이후 8월 초 설립신고는 반려되면서 청와대 벽을 넘지 못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안전행정부는 기재부와 합동으로 지방재정 주요현안 브리핑(영유아보육료 국고지원 분담비율 10%인상안)을 지난달 12일로 예고한 뒤 24일로 연기해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안행부는 "9월10일 서울시장, 인천시장 등 자치단체장을 모아놓고 사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많아 추후 다시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해명했지만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청와대 측이 발표시기를 늦추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례들은 행정의 신뢰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장관의 권한과 재량권이 제약되면 이견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무기력한 내각을 양산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박 대통령의 만기친람(萬機親覽) 리더십에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체제 등장 이후 더 심해졌다는 평가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거 정권들도 책임총리ㆍ장관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심각해질 수 있어 보인다"며 "청와대 수석들이 중요한 결정은 다하고 장관은 허수아비나 다름없게 되면 공무원들은 청와대만 살피게 돼 실질적 민생해결이 어렵게 된다"고 우려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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