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광주광역시에서는 얼마 전 '빛고을 문학관' 건립 문제로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예향 도시에 문학관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식으로 십여 년 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피력했고, 그에 부응이라도 하듯 시에서는 예산을 확보, 부지 선정 작업까지 착수했는데, 거기서 그만 사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유지를 대상으로 1순위, 2순위, 3순위 하는 식으로 문학관이 들어설 자리를 공개 천명하고, 그 와중에 추진위원회 사이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일어나더니(추진위원장이 갑자기 2순위 후보지를 공개 지지하면서 문제가 벌어진 모양이다), 결국엔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겠다며 부지 선정 작업마저 백지화된 것이었다. 추진위원회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앞으로도 문학관 건립 문제는 꽤 오랜 시간 지지부진, 제자리를 맴돌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에서는 다시 공유지를 대상으로 부지를 물색 중이라는 소리도 들리고 있다.
그런저런 소동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 문학관이라는 것을 지으려 하는 것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런 의문의 바탕에는 내가 그동안 가 보았던 국내 수십여 개의 문학관들의 천편일률적인 풍경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사실인데, 그곳들은 대부분 외관은 수려했으나 속 알맹이들은 보잘것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널따란 잔디밭과, 콘크리트 혹은 전면 유리로 지어진 이삼 층 규모의 문학관들은 커다란 멀티미디어실과 쾌적한 휴게실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자료들과 콘텐츠들은 그저 앙상하다는 인상만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늘 보았던 작가의 사진과, 작가가 쓰던 책상이나 의자, 친필 원고, 거기에 작가가 펴낸 몇 권의 작품들. 사실 그것들을 보관하는 데는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멀티미디어실에서 틀어주는 작가의 생애에 대한 다큐멘터리 등도 요즘은 맘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다 볼 수 있는 것들이다(학술 자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데, 왜 그렇게 쓸데없이, 경쟁적으로 커다랗게 문학관을 지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거기엔 문학과는 상관없는, 또한 작가와도 아무 관계없는, 어떤 경제적인 이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상품화하고, 작가의 생가를 관광 자원화 시켜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 혹은 지역 단체장들의 치적 쌓기 식의 홍보 수단, 그도 아니면 문학관을 둘러 싼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 그런 경우 대개의 문학관들은 건물은 높되 그 안에 담고 있는 문학은 상대적으로 왜소하다. 더불어 지역 주민들에게도 외면당해 찾는 이의 발길조차 나빌레라, 나빌레라, 하는 식으로 변해 버린다.
물론 그렇지 않은 문학관들도 여럿 보았다. 나는 봉평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이나, 보성에 있는 태백산맥 문학관, 고창에 있는 미당 문학관 등에서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작가와 작품을 추억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곳들의 공통점은 작가와 작품이 문학관이라는 콘크리트 건물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닌, 그 지역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학관, 작품 그 자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관 주도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과 애정이 문학관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지 않고선 불가능한 사례들이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빛고을 문학관'에 책정된 예산은 120억이 넘는다고 들었다.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건대 제발 '빛고을 문학관'을 짓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 광주의 문학을 기념하고 추억하겠다면, 그 돈으로 작은 도서관이나 어린이 도서관을 건립해, 그 도서관 귀퉁이에 작은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은 자리에 없는 작고한 선배 문인들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은 문학의 일이지만, 그 기억과 추억을 가두는 것은 문학의 일이 아니다. 재고를 바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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