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에 사는 50대 전모씨는 올 4월 동양증권 지점 A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자도 낮은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왜 목돈을 넣어두냐"는 것이었다. 이자를 더 주겠다는 제안에 지점에 찾아간 그에게 A부장은 동양 신탁기업어음(CP) 가입을 권하며 "최소 이윤이 6~7%"라고 강조했다. 이 상품은 동양레저가 발행한 CP로 10월 29일이 만기다. 전씨는 그 자리에서 1,000만원어치 상품을 가입하고 지난달에도 같은 전화를 받고 유선상으로 3,000만원어치 동양인터내셜 CP를 추가 가입했다. 전씨는 "투자설명서는 읽지도 않고 사인만 하고 비밀번호는 유선상으로 알려줬다"며 "투기성 상품이고 투자부적격등급채권이란 설명도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캐나다 교포 이모씨는 이달 13일 동양증권 직원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이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을 지원키로 약속했고 곧 공시가 나올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메일에는 '동양증권 정진석 사장이 책임지고 확인했다'는 문구까지 있었다. 이씨는 "동양 회사채를 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얘기를 믿고 29억원을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보게 됐다"고 분개했다.
동양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이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직격탄을 맞은 개인 투자자는 4만명이 넘어서며, 피해 규모는 수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저축은행 사태를 버금가는 초대형 금융소비자 피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30일 금융감독원은 동양증권을 통해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 CP에 투자한 이들은 1만3,063명, 동양 회사채에 투자한 이들은 2만8,168명이며 판매액수는 각각 4,586억원, 8,725억원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투자자 가운데 99% 이상이 개인이라는 점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동양그룹이 신용도 하락으로 정상적인 자금 수혈이 어렵자 개인투자자들에게 손을 벌려 돈을 긁어 모은 후 부도를 선언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소매금융에 강점을 보이며 우량 고객을 많이 확보한 동양증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과 금융소비자원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장기간 거래해 온 동양증권 지점 직원을 믿고 투자한 것이 대부분이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최근 몇 달 사이 동양증권 직원들에게 동양그룹 CP와 회사채 판매에 대한 할당이 내려진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이게 사실이라면 불완전 판매를 넘어 최악의 금융 사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정황 때문에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동양그룹의 위기가 불거진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된 위험 경고가 이뤄지지 않아 투자자들의 피해를 방조했다는 지적이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금감원은 적극적인 소비자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해당 기업의 자구책과 가입자의 투자책임만을 부각시켜왔다"며 "지금이라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 피해 사례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법규가 미비했다는 해명에 급급하고 있다. 김건섭 금감원 부원장은 "동양그룹을 감독하면서 투기등급 채권을 계열사를 통해 판매하는 것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제한하는 법안을 올 4월 제정해 다음달 24일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동양증권을 통한 투기등급 회사채 판매를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 읽고 외양간 고쳤다'는 해명이다. 하지만 이 법안의 시행이 올 10월로 유예된 것은 동양 측의 요청을 금감원이 받아들인 결과라는 지적이 많아 오히려 더 큰 비판을 부르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으로 확산돼도 불완전 판매를 입증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동양계열사에 투자한 투자금에 대한 보상 규모는 기업회생절차에 따른 법원의 결정에 의해 정해진다. 금감원 관계자는 "투자설명서에 고객 서명이 들어간 데다 녹취를 한 게 아니라면 사실상 불완전 판매 여부가 가려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원금의 100%를 보장받기 힘들어 개인투자자의 피해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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