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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10월 1일] 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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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10월 1일] 항명

입력
2013.09.3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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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0월2일 박정희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기 때문이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의 동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탈표도 무려 20표를 넘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0ㆍ2 항명 파동이다. 당시 공화당 실세 4인방인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등이 자기 계보의 시장 군수 경찰서장을 정리한 오치성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다 야당이 해임안을 내자 선뜻 동조한 것이다.

▲박정희는 다음날 서울컨트리클럽으로 가 1번 홀에서 '김성곤 이 놈' '길재호 나쁜 자식' 등 4인방의 이름을 되씹으면서 수십 개 공을 후려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놈들 다 잡아들여"라고 지시했다. 이에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로 잡혀가 고문과 취조를 당했고 김성곤 길재호는 의원직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혔고 길재호는 입술이 비틀리는 수모를 겪었다. 3권 분립, 면책특권 등 헌법 조항도 대통령의 명 앞에서는 휴지조각이었다.

▲10ㆍ2 항명 파동은 겉으로는 4인방과 오치성의 대립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들을 제거하고 종신 집권으로 가려는 박정희의 구상에 따른 결과물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69년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안이 공화당 의원 40여명의 동조로 통과된 4ㆍ8 항명 사건 때는 그 책임을 물어 3선 개헌에 반대하는 JP(김종필)계를 숙청했고, 3선 개헌의 공신인 4인방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들을 제거하고 1년 뒤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했다는 것이다.

▲42년이 지난 지금,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복지공약 축소에 항의, 사표를 내는 일이 벌어졌다. 시대가 달라졌고 사안도 훨씬 가볍지만, 언론은 진 장관의 사표를 항명으로 규정, 큰 일 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조선의 강력한 군주였던 태종과 세종은 사헌부 관리들이 대사헌 이발 임명을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이는 등 대간들의 잦은 항명을 용인했다. 항명에도 충정과 정도가 있고, 보신과 사감이 있음을 구분했던 것이다. 박근혜 시대의 항명은 어느 쪽일까?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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