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가을에는 경조사가 많다. 이번 계절도 어김없다. 결혼잔치야 미리 날을 받으니 당연한 일일 테지만, 슬픈 소식도 왜 봄가을에 집중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진 분들도 볕 좋고 바람 좋은 날을 잡아 의식의 끈을 놓는 걸까. 며칠 전에도 부음이 날아왔다. 지인의 부친상이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는 장례를 치르는 장소, 발인 날짜와 함께 계좌번호가 찍혀 있었다. 다녀올 처지가 아니어서 그 계좌로 조의금을 넣었다.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문 가는 사람을 수소문해 내 이름으로 조의금을 넣어 달라 부탁하고, 내 몫의 액수를 그에게 전달하는 이중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다들 그 번거로움을 알고 있으니, 상주의 계좌를 부고와 함께 알리는 건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흰 봉투라는 최소한의 격식조차 생략된 이 간편함이, 좀 민망하기는 하다. 슬픔도 돈을 통해 나누겠다는 뜻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달까. 문상을 직접 다녀올 수 없을 바에야 사실 봉투에 넣어 전하거나 계좌로 보내거나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흰 봉투는, 안에 들어있는 것의 차가운 상스러움을 얼마쯤 가려준다. 또 아무리 성의 없이 전달된 봉투라도 봉투에는 지폐만이 아니라 위로의 마음도 미미하게나마 딸려 들어갈 것이다. 그 봉투조차 없이, 계좌이체로 내가 보낸 것은 뭘까. 고인의 가족이 받은 것은 또 뭘까.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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