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탄 차량 행렬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반드시 앰뷸런스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하필 워싱턴시가 배차한 앰뷸런스의 휘발유가 바닥나 대통령 차량 행렬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지난달 일어났다. 10년도 더 된 앰뷸런스의 연료 게이지가 고장 난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워싱턴의 앰뷸런스 소동은 미국의 주와 도시가 겪고 있는 재정상황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지방정부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가장 큰 채무폭탄으로는 연금이 꼽힌다. 샌프란시스코 옆에 위치한 콘트라코스타 카운티는 실리콘밸리의 경기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 지역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소방당국은 6개 소방서가 폐쇄 위기에 몰렸다며 지난해 11월 증세 방안을 주민투표에 부쳤다. 동정적이던 여론은 그러나 한 시민단체가 10만달러 이상의 연금을 받는 소방관 퇴직자 665명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뒤집어졌다. 호황 여파가 미치던 2000년 지방정부가 50세에 퇴직하면 직전 연봉의 90%를 연금으로 주기로 소방관 조합과 합의했기 때문에 고액 연금이 가능했다. 20만달러 이상 수령자도 24명이나 된다. 퇴직 소방관에게 그 많은 연금을 주기 위해, 세금을 더 내지 않으면 소방서 문을 닫겠다는 논리는 주민을 인질로 삼은 것으로 비쳤다. 주민투표는 자연스럽게 부결됐고 연금 조정 여론이 거세졌다.
콘트라코스타의 얘기는 지금 미국 어느 곳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했던 연금을 충분히 지급할 정도의 조세 수입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 평균보다 2만달러나 많은 연봉을 받는 시카고 공립학교 교사들이 지난해 9월 학생 35만명을 볼모로 연봉 인상, 교사등급제 반대 등을 내세워 파업한 것에도 퇴직 이후 연금 문제가 얽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회계기준위원회(GASB)에 따르면 지방정부의 부채 가운데 공공부문 연금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무폭탄으로 불리는 연금 문제는 서로 합의 조정하든가 법원에 파산을 신청, 강제 조정 또는 무효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샌디에이고시는 주민 합의로 파산을 면했지만 디트로이트시는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으로 한때 미국 6대 도시에 속했던 디트로이트를 교통 신호등조차 제대로 켤 수 없는 식물도시로 만든 큰 원인은 '빅3'로 불리는 자동차 업체들을 따라간 정책이었다. 제너럴모터스(GM)는 1978년 50만명의 노동자가 일했지만 2009년 파산 무렵에는 그 수가 5만4,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GM은 그 5만4,000명으로 45만 퇴직자의 연금과 건강보험을 계속 책임져야 했다. 이를 흉내 내듯 디트로이트는 사회간접자본에 무리하게 투자하고 퍼주기 식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등 무리수를 계속 두었다. 파산 규모의 3분의 1이 연금이었다.
미국은 금융위기 5년이 지나면서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퇴직자가 늘고 연금에 기여하는 납세자는 줄어드는 현상을 맞고 있다. 이에 맞춰 민간에선 은퇴 이후 삶이 하향조정되고 있지만 공공부문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공공부문에 제공할 연금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납세자들로서는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퇴직한 내 이웃에게 연금을 주기 위해 내 딸 아이의 교육환경이 나빠져야 하느냐"거나 "다른 지역에 살기 때문에 세금도 안 내는 퇴직 경찰에게 연금을 주기 위해 현직 경찰을 일시 해고하고 그래서 올라가는 범죄율을 그냥 지켜봐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공공부문 쪽에서 보면 답답한 노릇이다. 납세자들이 부담하기 싫다면 그런 공약을 내세웠던 선거직 공무원을 뽑지 않으면 됐기 때문이다.
재정적자가 쌓이는 가운데 벌어진 한국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수정 파문을 보면, 미국의 일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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