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과 미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난항인 모양이다. 4차까지 진행이 됐지만 아직 합의 기미가 없다. 돈 문제만큼은 동맹이고 뭐고 없다는 분위기라 할 만큼 첨예하고 치열하다. 양측의 국가 이익과 국내 정치적 이해가 걸려 있어 쉽게 타결될 구조가 아니다. 이 가운데 한미 당국의 국내 정치적 이해가 걸린 난제가 방위비 전용(轉用) 문제다. 사용 목적이 정해져 있는 방위비를 주한미군이 원래 목적과 달리 미 2사단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비용으로 쓰고 있는 부분이다. 국회의 압박을 받고 있는 우리 정부는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다. 참여정부 시절 우리 국방부가 이에 대한 양해를 해준 터라 우리 정부가 미국의 선처만 바라고 있을 따름이라고 보는 게 무방하다.
참여정부가 양해 사실을 숨기고 국민의 눈을 속여왔다는 사실은 2011년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문서 폭로를 통해 드러났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대사가 2007년 "한국정부가 '심판의 날'(Day of Reckoning)을 미루고 있다"는 코멘트를 달아 미 국무부에 보고한 내용은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알고 지내는 외교관은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보다는 '결제일'로 해석하는 게 낫다고 했다.
그게 심판의 날이든 결제일이든 버시바우 대사의 코멘트는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문제의 심각성을 키우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남 보기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의 입장이 확고하다 보니 적어도 상응한 대가를 우리가 지불하지 않는 이상, 미 2사단이 평택으로 완전 이전하는 그날까지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한 게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 후퇴 문제 수습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다. 결제일을 미루고 있다는 일종의 기시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6일 국무회의에서 기초연금 공약 후퇴에 대해 "어르신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겨 죄송한 마음"이라며 "이것이 공약의 포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 "약속한 (공약) 내용과 일정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부분들도 임기 내 반드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기초연금을 포함한 복지 공약 이행 의지는 어떤 구체적인 플랜이 있다기보다는 대부분 경제부흥이라는 미래에 대한 낙관에 기대고 있다. 저성장 경제구조로 보면 장밋빛 기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탈루 세금을 봉쇄해 세금을 더 걷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 복지 강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색하겠다는 대통령의 말도 노사정위원회가 그간 걸어왔던 비효율의 길을 생각한다면 실효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러 경제전문가들이 이미 대선 때부터 공약대로 하다간 나라를 거덜 낼 일이라 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했으니 정말 공약을 지킬 수 있겠냐는 의심은 정부 내에서도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도 박 대통령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다"고 한 데는 그간 자신이 쌓아온 '약속의 정치인' 이미지를 깰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을 보듯 뻔한 야당의 맹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의 선거법 위반 기소로 정통성에 약간의 흠집이 난 마당에 임기 초반부터 역시 정통성의 기반인 공약마저 지키기 어렵게 됐다고 말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결제일을 미뤄서 상황이 호전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오랜 경험칙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대통령의 덕목으로 중요한 것이 약속인지, 상황을 직시하는 솔직함과 정정당당함인지 따져볼 시기가 멀지 않은 것같다.
정진황 정치부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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