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에는 망각이 없다. 기억되지 않고 기록되기 때문이다. 어떤 기록은 과거로 잊히지 않고 무한 증식하다가 불쑥 현실로 귀환하기도 한다. 글 한 줄, 사진 한 장이 비수처럼 언제 어떻게 내 심장을 향해 날아들지 모른다. 인기 연예인쯤 되는 유명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은 지난 4월 출간한 란 책에서 "개인의 사진이나 메시지를 삭제해 주는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미 해외에선 '레퓨테이션(reputation.com)'처럼 디지털 라이프의 과거를 '세탁'해 주는 업체들이 생겨나 개인이나 기업의 사이버 흔적 지우기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국내에도 최근 유사한 업체가 등장했다.
"디지털 과거 평생 클리닝"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는 일상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는 SNS상의 특정인의 이력을 수집한 뒤 삭제를 대행해 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0년 광고모델 에이전시로 영업을 시작한 이 업체는 자신의 '흑역사'로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는 데 착안, 지난 3월부터 온라인 흔적-글과 사진, 루머와 악성 댓글 등-을 지워 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고객층을 일반인으로 확대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업체 사무실에서 만난 김호진 대표는 "앞으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는 혼수에 앞서 각자의 과거부터 챙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업체는 요즘 예비부부들의 '클리닝' 상담으로 분주하다. '밤의 과거'가 찜찜해 웨딩드레스를 입기 두려운 예비신부 등 하루 100여 통 가까운 상담 전화가 걸려 온다. 페이스북 글 때문에 곤경에 처한 취업 준비생, 은밀한 동영상이 유출돼 곤욕을 겪는 커플 등도 고객이다. 실제로 디지털 흔적을 지운 고객은 지금까지 약 30여명. 1인당 비용은 '과거'의 성격에 따라 100만~200만원 선이라고 했다.
흔적을 지우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고객이 위임한 정보를 자체 프로그램에 넣어 부정적인 내용을 걸러낸 뒤 직원 30여명이 악의적 잔존 데이터의 뿌리를 파고 든다. 국내 포털과 메신저,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 일일이 삭제를 요청하고, 법적 대응도 한다. 최초 유포자를 추적해 원본을 삭제케 하는 것은 기본이다. 각종 동영상이 무분별하게 퍼지는 온상인 해외 토렌트 업체와 접촉해야 할 때도 있다. 개인이 가진 조각파일들까지 손쓰긴 어렵지만 올라온 영상은 지울 수 있다고 한다. 사후 관리도 이어진다. 김 대표는 "고객이 지워달라고 했던 특정 과거들이 사이버 상에 뜨는 족족 알림 신호가 오기 때문에 같은 파일에 대해선 평생 클리닝서비스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다만 트위터의 리트위트(RTㆍ퍼나르기) 등 SNS상의 일부 공유 기능으로 퍼져 나간 흔적들에 대해선 완벽히 지우는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월 '잊힐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저작물로 일반에 공개할 목적으로 제공한 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을 이행하지 않는 사업자에게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디지털 흔적 관리 업체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잊힐권리연구포럼에 따르면 현재 5, 6곳의 업체가 유사한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늙어 소멸하고, '펑' 사라지는 데이터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것과 달리 디지털 데이터를 서서히 늙고 소멸하게 하는 기술도 등장했다. 사용자가 글이나 사진을 올릴 때 타이머로 소멸 시점을 지정할 수 있는 '디지털 소멸 시스템(Digital Aging SystemㆍDAS)'이다. DAS가 가동되면
모든 데이터는 '빛 바래기' '노이즈 끼기' '변형 되기' 등의 방식으로 노화한다. 데이터 생성자나 방문자의 방문이 뜸하면 노화는 더 빨라진다. 지난 13일 이 기술의 특허를 출원한 이경아씨는 초등학교 교사다. 그는 제자를 상담하다 이 기술 개발에 착안했다고 했다.
더 빠르고 단순한 방법도 등장했다. 디지털에 남긴 메시지가 몇 초 뒤에 '펑' 하고 사라지게 하는 기술이다. 미국에선 이미 10초 뒤에 자동으로 사진이나 글을 지워 주는 '스냅챗(Snapchat)'이란 앱이 애용되고 있다. 국내에도 지난달 초 이와 유사한 '비밀톡'이 나왔다. 페이스북 전용 앱인 '버니버닛(Bunny Burnit)'은 희망에 따라 최단 1초 만에도 메시지를 자동으로 지워 주는 앱이다. 맹수연 버니버닛 대표는 "누구나 순간적인 감정을 딱 그때 분출하고 싶을 때 1초 만에 지워 주는 게 요긴하다"며 "트위터 버전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이 앱은 PC웹 버전으로만 나왔지만 4,000여명이 이미 이용 중이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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