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오늘 서울에서는 총성이 일시에 멎었다. 한미 연합군이 석 달 간 북한 치하에 있던 서울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9월15일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22일 서울의 최대 관문이었던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연희고지에서 북한군과 맞닥뜨렸다. 시가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연희고지를 놓고 연합군은 500여명, 북한군은 2,500여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양측은 4일 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25일 연희고지를 점령한 국군은 27일 새벽 광화문 일대에서 북한군을 모두 퇴각시켰다. 포연 자욱한 세종로를 가로질러 옛 중앙청 안으로 들어간 해병대 박정모 소위는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돌기둥 중앙에 동여맸다. 태극기는 그렇게 서울 상공에 펄럭였다. 28일 정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에서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는 시민들과 함께 수도 탈환식을 가졌다.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했지만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으로 남측은 패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당시 상황은 2차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와 흡사하다. 1940년 6월 파리가 독일에 의해 함락되었고, 4년 뒤인 1944년 6월 미국 등 8개국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해 20여일 만에 독일군을 격퇴했다. 이어 프랑스군은 8월25일 개선문을 통과하면서 파리 수복을 알렸다. 이후 파리시는 매년 이날 수복일을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중ㆍ고교와 시립도서관에서는 관련 영상을 방영하고 각종 심포지엄과 음악회, 사진전 등을 개최한다. 내년은 파리 수복 70주년이라 더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 우린 어떤가. 국가적인 기념행사는 고사하고 서술 논란이 일고 있는 각종 국사교과서 안에도 9ㆍ28에 대해서는 피상적 언급에 그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52.7%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연도도 제대로 모르는 것으로 조사됐는데도 말이다. 역사의 평가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객관적 사실만큼은 온전히 기록되고 기억돼야 한다.
염영남 논설위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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