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인호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와 글들을 검색해보며 눈에 띤 말들 가운데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한국문학의 거목이니 큰 별이니 하는 다분히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내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작가'라는 표현이었다. 70년대라는 권위주의적 정권이 드리운 그늘 아래 우울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내게 작가 최인호의 발견은 그야말로 구름 사이로 문득 드러난 푸른 하늘과 마주친 순간이라 할 만했다.
지방도시 거리 한 모퉁이 좌판 위에 무더기로 쌓인 헌책들 사이에서 이나 같은 그의 초기 단편집을 집어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암담한 '겨울공화국'을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첫걸음을 떼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문관이라는 지금은 잊혀진 출판사에서 출간된 그의 소설집은 그때까지 내가 읽어온, 국어교과서나 한국명단편선집 같은 데 실린 기존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질감과 속도감으로 나를 온통 흔들어 놓았고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시공간으로 휘몰아갔다. 아, 한국어로 이런 작품이 씌어질 수도 있구나, 단군의 자손에게도 이런 상상력이 허용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이 그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의 기발하면서도 창의력 넘치는 상상력과 독특한 캐릭터, 경쾌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직조된 소설들은 대지의 무거운 중력을 가볍게 벗어던지고 대기권 바깥의 무한 허공으로 유영하는 자유를 내게 선사했다.
이어서 찾아 읽게 된 그의 장편소설들 역시, 비록 상업주의와의 타협이라는 세간의 공격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인호라는 '미다스의 손'의 위력을 실감하게 만드는 흡인력을 과시하며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을 후다닥 읽어치우고 를 오래 들여다보았으며 그가 에 연재하던 을 읽기 위해 잘 펼쳐들지 않던 문예지까지 들춰보게 되었다.
물론 대학생이 되고 좀더 성숙한 시선으로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 이후 그의 문학에 대한 열광은 예전 같진 않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젊음'을 상징하는 작가였고 도시적 모더니즘의 전령이었으며 일탈과 위반을 부추기는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재편되던 그 시점에 그의 소설은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를 떨쳐버리고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소비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드잡이질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지침서였다. 청춘의 긍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그것의 이면, 즉 유치함과 혼란스러움과 허망함까지 아우르는 그의 소설은 그래서 기묘한 울림을 가지고 내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장년에 접어들면서 최인호는 '작가'라기보다 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종교에 귀의했고 작품에 이런저런 역사문제나 초월적 가르침을 세련되게 가공해서 담아내는 능력을 선보였다. 등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예전에 최인호론을 쓰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등장과 성공 이후 시장의 유혹과 문단의 승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은, 무수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선택이 아니라 다수의 관례가 되었다."
나에게 그는 시가를 문 채 무슨 얘기든 재미있게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억된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인의 풍모를 갖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자신의 타고난 악동 기질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장난스러움이 표정과 말투에서 배어나왔다. 그에겐 한 분야에서 절정에 오른 적이 있는 대가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과 영원히 젊은 영혼의 개구장이적 기질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판에 일체 고개를 디밀지 않는 그 나름의 순수함을 끝까지 실천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으로 인한 빈자리가 유난히 허전하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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