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소년 최인호가 꾸던 유일한 꿈이었다. 1962년 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전부터 그는 상상 속에서 이미 작가였다. 이듬해 도벽이 심한 한 소년의 비행을 그린 '벽구멍으로'가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이 됐을 때 그는 당연히 다가올 미래라고 생각했다. 2002년 한국일보 연재 칼럼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서 57세의 작가는 하루에 단편 하나씩을 쓰며 보내던 고교 시절을 복기하며 "나는 먼 미래의 눈에서 현재를 회상하고 있었으므로 너무나 당연하게 이를 받아들였다"고 적었다.
입선작이 고교생의 것이란 게 드러나자 심사위원들은 당황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그 때 심사위원이 황순원 안수길 선생이었는데 두 분은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는 심사평을 해주었지만 막상 시상식장에 고등학교 2학년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입선자의 이름만 내보내고 작품을 신문에 게재하지 않았지만, 고인은 "한국일보는 내 친정"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 한국일보는 1964년 중학동 사옥에 화재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육필 원고가 소실되게 한 '원죄'가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미지의 작품으로 남아 버린 '벽구멍으로'를 데뷔작이라고, 63년 한국일보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을 통해서지만, 올 봄 나온 투병기 의 서문에 "이 작품은 등단 50주년을 기념한 것"이라고 쓴 것은 한국일보 입선을 문학적 이력의 시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1973년 당시 자매지였던 일간스포츠에 을 연재했고, 1995년 다시 한국일보로 돌아와 을 발표했다. 2년 뒤엔 400만부가 팔린 최고 베스트셀러 를 한국일보에 연재했다. 당시 한국일보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던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은 "늘 한국일보가 친정 같다고 했던 고인은 한국일보의 사세가 꺾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다른 신문에서 더 좋은 조건을 내걸어도 우리에게 글을 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대하소설 는 1997년 7월 1일부터 2000년 9월 30일까지 1,050회 연재라는 기록을 세운 뒤 2010년 출간돼 7개월 만에 100만부가 팔릴 만큼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400만부 이상 팔린 이 소설은 TV 드라마로도 제작됐고 청소년판으로 다시 나오기까지 했다.
고인의 악필에 문학 담당 기자들은 소설이 연재될 때마다 고생을 감수했다. 때론 작가 본인도 못 알아보던 글씨를 활자로 옮겨야 했던 기자들은 입을 모아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병마가 손톱을 삼킨 뒤에도 그는 만년필과 원고지를 고수했다. 2007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집이 아니라 컴퓨터로 쓰는 것 자체가 싫어. 아직도 원고지 갖다 놓고 쓰는 게 사랑하는 여자랑 껴안는 것 같아. 내가 쓰려는 테마 자체를 안아버리는, 정면 대결하는 느낌이 있거든."
한국일보 기자들 사이에선 올해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조촐한 행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꾸준히 돌았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고인은 이 세상을 떠났다. 고인에게 헌정되는 두 페이지는 한국일보가 뒤늦게 벌이는 '최인호 등단 50주년 기념행사'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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