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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작가로 남고 싶던, 고인의 문학적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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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 작가로 남고 싶던, 고인의 문학적 유언장

입력
2013.09.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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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타인의 방을 40년 만에 다시 쓴 장편 타인의 방항암치료로 빠진 손톱 자리에 골무를 끼우고 구역질 참아가며 두 달 만에 써내"독자를 의식해 쓰지 않았다 나 하나를 위해 쓴 수제품"50년간 발표했던 수많은 장편과 대하소설은 외부 청탁이나 연재용이라며"내 본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체질 개선한 후의 첫 작품"그는, 오랜 소망을 이루게 해 준 암에게 고맙다고 했다

최인호는 의 작가다. 물론이다. 하지만 최인호는 의 작가가 아니다. 그는 '타인의 방'의 작가다.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 자리에 골무를 끼우고, 구역질이 나올 때면 얼음을 씹어가며 두 달 만에 원고지에 써냈던 유작 장편 는 '나는'타인의 방'의 작가이고 싶다'는 그의 문학적 유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학적 유언장을 다시 읽는 일은 1971년'타인의 방'에서 2011년 로의 40년을 가로지르는 시공여행이 된다. 단편에서 장편으로의 형식 변화는 단수에서 복수로, 방에서 도시로의 확대라는 이 여행의 필연적 귀결이다.

오늘날 인간이란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를 최인호는 스물여섯 도시 청년의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선취했다. 21세기의 청년이 읽어도 또 한번 놀라운 '타인의 방'은 그가 하룻밤 만에 써서 문학평론가 김치수에게 갖다 준 단편이지만, 그날 밤은 냉혹한 자본주의의 인간멸시와 소외된 인간의 깊은 슬픔이 하나의 알레고리로 또렷하게 주조된 한국문학사의 역사적인 밤이다. 그가 '창비의 리얼리스트' 황석영에 대적할 '문지의 모더니스트'로 이른바 '문지4K'의 김현, 김병익, 김치수에게 크게 주목 받은 이유다.

출장에서 예정보다 하루 빨리 돌아온 '그'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도시의 아파트로 귀가한다. 하지만 아내는 "오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와서 친정에 간다"는 메모를 남긴 채 부재한다. 하필 남편이 돌아오는 날 전보가 왔다는 투로. 극심한 여행의 피로와 짜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의 미리 해놓은 거짓말에서 불륜의 단서를 포착한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욕실의 거울을 보고, 분말주스를 타먹으며 도시적 일상을 거행하는 '그'는 그러나 설탕을 젓던 스푼이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일련의 놀라운 일들을 당하게 된다.

불을 끄면 방안의 크레용, 성냥, 혁대, 옷들, 꽃병의 꽃까지 모든 사물들이 날아오르며 '그'의 몸을 건드리고 희롱한다. 불을 켜면 모든 것이 제자리. 이 환상 속에서 그는 서서히 몸이 굳어가며 "새로운 물건"으로 변해버린다. 돌아온 아내는 이 물건을 처음에는 사랑하지만 이내 싫증을 내고 다락방에 처넣어 버린다. 다시 메모를 남기고 집을 떠나는 아내.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아버님이 위독하다는 거예요.…"

는 누가 읽어도 말년의 최인호가 다시 쓴 '타인의 방'이다. 고2때 문단에 데뷔한 그는 스스로의 표현을 빌면 "50년간 헤아릴 수 없는 수십 편의 장편소설과 대하소설을 집필"했지만 "그 모든 소설은 외부의 청탁에 의해 쓴 신문이나 잡지의 연재소설"이었다. 하지만 이 유작소설은 "청탁이 아닌 스스로의 열망으로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독자를 의식해서 쓴 작품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독자를 위해 쓴 수제품"이며 "내 본령인 현대소설로 돌아가기 위래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체질 개선 후의 첫 작품"이다.

'작가의 말'에는 30년 넘게 써온 역사소설이나 종교소설들은 "세월이 이끄는 순리대로 살다 보니 나로서는 뜻밖으로" 쓰게 된 작품들이라고 씌어 있다. 고인의 오랜 문우 김형영 시인은 "최인호는 자신의 대표작을 '타인의 방'과 '깊고 푸른 밤'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초기 단편들을 쓰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향수를 토로하곤 했다"고 전했다. "신문, 방송, 영화 쪽에서 그냥 놔두지를 않은 탓이지만, 왜 그렇게 빨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지 아쉽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암 투병은 '최인호 문학 3기'로의 결단을 가능케 한 촉매였던 셈인데, 그 자신 "공염불에 그쳤을 체질개선을 가능케 한 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의 주인공은 결혼생활 15년째인 금융맨이다. 이름은 카프카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K. 따르릉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오늘이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가 알람을 맞추었을까 의아해하며 일어난 그는 나신이고, 그가 늘 입고 자는 잠옷은 아침식사 준비 중인 아내가 입고 있다. 아내는 그토록 도발적인 여인이 아니다! 그가 일평생 써온 스킨의 브랜드는 V에서 Y로 바뀌어 있고, 분명히 K의 아내가 맞는 여인은 난생 처음 보는 표정과 몸짓으로 K를 당황케 한다. 생각해보니 어젯밤 아내의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소설은 자신을 둘러싼 낯익은 환경이 미묘하게 낯설게 변해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K가 겪는 토요일 아침부터 월요일 출근길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런 체험들을 서스펜스의 형식으로 숨가쁘게 이어간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쓰인 형용사는 '낯익은'과 '낯선'이다. 반의어인 두 단어가 기실은 동의어임을 밝히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자 플롯이다. 처제의 결혼식에서 K는 낯익되 낯선 아내가 소개하는 오래 전 죽었다는 장인을 처음으로 만나고, 몇 년 만에 찾아간 누이의 집에서 누이의 새 남편을 만나는 데 그게 결혼식에서 본 장인이다. 잃어버린 휴대폰을 돌려받기 위해 오전에 만난 보험설계사는 밤에 대리운전사를 불러놓고 보니 또 같은 인물이다. 다만 그 낯익음을 K만이 느낄 뿐이다.

인칭의 분할과 종합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새삼 묻고 있는 이 소설은 세계가 뫼비우스의 형식으로 이분돼 있다고 말한다. 도플갱어의 틀을 빌어 '너'라는 2인칭은 '나'라는 1인칭의 분할이며, 2인칭 '너'는 사실상 3인칭 '그'와 같은 말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이토록 낯설고 의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가짜로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짜의 '나'로 바꿔치기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K는 깨닫는다. K는 자신이 사실은 K2이며 어딘가에 K1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마침내 그를 찾아낸다. 흡사 SF소설처럼 K1과 K2가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거쳐 통합하는데, 그 계기는 지하철로에 떨어진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1인칭과 2인칭과 3인칭은 그러니까 복잡하기는 하지만 하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가 된 K가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그가 환상체험 속에서 만났던 온갖 희귀한 인물들이 퍼레이드를 하듯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K의 곁을 지나며 작별인사를 하는 월요일 출근길 장면은 눈물이 핑 돈다. 거기에는 아이였던 K를 안은 엄마와 소녀였던 누이,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던 젊은 아버지도 있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낙원에서 춤추는 서커스 단원들처럼 보였다. … K는 스쳐가는 어머니의 손을 잡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엄마' 하고 손을 뻗었으나 단지 영상에 불과한 홀로그램은 스러지고 그 대신 K의 손에 뭔가 잡혔다. 아이가 들고 있던 빨간 풍선이었다."(374쪽) "나는 정말 엄마를 사랑했어"라고 K1과 K2는 싸움의 와중에서도 맞장구를 했었다. "고독한 독자인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써준 또 하나의 작가인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고 밝힌 소설에서 작가가 마지막으로 뜨겁게 마주한 것은 결국 어머니였다.

고인의 빈소에서 26일 만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이 소설을 내고 최인호씨가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는 책을 보내줄 테니 서평을 좀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써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타인의 방'과 간에는 40년의 시차가 있다. 어쩌면 작가 최인호의 결단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옛 소설의 위업이 재현되기 어려울 만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의 부음이 아니었어도, 오늘날의 독자에게 는 단숨에 읽힐 정도로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이 작품이 최인호의 바람대로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자리매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방'이 선취한 충격적일 정도의 놀라운 현대성 때문일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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