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여성들의 옷 길이는 여전히 짧다. 치마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엔 상의다. '베어내다, 잘라내다'는 의미의 길이가 짧은 상의인 크롭 톱(crop tops)이 이번 가을에도 큰 인기를 얻을 전망이다. 배꼽 위로 깡충 올라오는 배꼽티로 대표되는 크롭 톱은 최근 몇 년 간 꾸준히 여심을 사로잡으며, 계절적으로 지난 여름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 가을에도 크롭 톱은 주목해야 할 패션 품목이다. 특히 패션이 단순한 의복의 의미를 넘어 한 사회의 문화가 담기는 생활양식임을 감안할 때 크롭 톱의 인기를 반짝 유행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의상의 목표는 이상적 인체미
패션을 사회와 동떨어진 분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의상 디자인에는 당연히 시대의 미의식이 담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기 위해 디자인에 다양한 착시 효과가 동원되기도 한다. 특히 부분적으로 과장된 장식물 등을 부착해 허리만 잘록한 X라인에 가까운 실루엣을 만들었던 1980년대 등과 달리 최근의 의상 디자인은 옷 자체보다 인체를 돋보이게 하는 데 더 집중한다. 예전에는 옷이 예뻐서 사 입었다면 지금은 입었을 때 내 몸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더 집중하는 셈이다. 1990년대 등장한 '몸짱' 열풍 이후 지속적으로 이상적인 외모와 체형을 가지려는 노력이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은 까닭이다.
이에 따라 선과 색채, 재질 등의 디자인 요소 중 그 어느 때보다 선이 중요해졌다. 특히 허리선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중요하다. 인체의 중앙에 위치해 비례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리가 상대적으로 긴 신체 특징을 지닌 동양인으로서는 다리가 길어 보이는 의상 조합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크롭 톱의 등장을 1990년대 유행의 회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상의를 허리선보다 짧게 해 상하의가 황금비례를 이루는 인체미를 제시하기 위하려는 목적이 더 강하지 않을까.
국경 사라진 스타일 동향
패션 동향이 늘 그렇듯 크롭 톱의 인기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섹시한 여성의 사진을 핀으로 벽에 부착해 뒀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핀업 걸'의 이미지, 즉 글래머러스한 미국의 여배우나 모델들을 상징하는 의상 중 하나가 크롭 톱이었다.
최근 열린 2014년 봄ㆍ여름 뉴욕 패션위크를 강타한 품목도 역시 크롭 톱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여성들은 복근 운동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 여름 스타일을 강타한 크롭 톱의 인기가 내년 봄까지 계속된다"며 패션쇼 현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런웨이와 거리의 의상이 분리돼 있던 과거와 달리 매체 발달로 이제 이 같은 패션쇼 의상은 실시간으로 젊은 소비자들에게 전파된다. 해외 패션 블로거들을 통해 뉴욕, 파리, 밀라노 등지의 최신 패션 정보를 접한 여성들은 제조ㆍ유통 일괄형(SPA) 글로벌 브랜드에서 유사 아이템을 구입해 곧장 거리 패션으로 소화한다. 노출도 과감히 시도하는 추세다. 이번 뉴욕컬렉션의 동향 대로라면 내년 봄에는 속살이 훤히 보이는 크롭 톱을 거리에서 발견하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듯하다. 스타일리스트 윤인영씨는 "젊은 소비층의 경우 매체가 다양화하면서 해외 소식까지 패션 정보를 폭넓게 접할 수 있게 됐고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체 노출이 있는 짧은 크롭 톱까지도 어렵지 않게 시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는 허리선이 좌우한다
결국 이번 가을 멋 좀 아는 당신이라면 주목해야 할 것은 허리선이다. 도시화된 현대의 패션은 점점 더 영리한 방식으로 미의 규범을 구현한다. 따라서 허리선의 위치를 달리함으로써 다양한 스타일 변화가 가능해진 셈이다.
주로 캐주얼한 의상으로 표현되는 스웨트 셔츠도 길이가 짧은 크롭 셔츠를 활용하면 정장 스커트를 함께 입어 출근 복장으로도 시도해 볼 만하다. 다양한 허리선의 변주로 앞뒤 길이가 다른 크롭 톱도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아직은 짧은 상의가 어색한 여성들이 환영할 만한 품목이다. 크롭 재킷도 만만한 아이템이다. 길이가 짧아 허리 라인을 부각시켜 주기 때문에 여성미가 극대화된다. 길이가 아주 짧은 크롭 톱을 가장 쉽게 도전하는 방법은 겹쳐 입기다. 원피스와 같이 입으면 노출 없이도 감각적인 연출이 가능하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패션 감각이 통용되듯 몸의 아름다운 비율도 어디에서나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대다. 다리가 긴 서구 체형을 선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하의실종' 패션도 크롭 톱의 유행과 함께 계속될 예정이다. '하의 입는 것을 잊은 듯하다'해서 하의실종이라 이름 붙은 레깅스 패션에는 엉덩이를 완전히 덮는, 보통 셔츠보다도 훨씬 더 긴 셔츠가 어울린다.
패션 정보의 홍수 속에 일부에서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아닌 외모와 스타일에만 너무 관심 갖는 게 아니냐 비난할지 모르지만, 유난히 짧고 긴 상의가 공존하는 현상은 어쨌든 무리한 다이어트로 몸을 바꾸는 것보다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착시효과를 통해 좋은 비율을 찾으려는 노력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장소 협찬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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