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칼럼 36.5°/9월 27일] 용돈이나 주겠다는 복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칼럼 36.5°/9월 27일] 용돈이나 주겠다는 복지

입력
2013.09.26 11:25
0 0

타고난 성격이 삐딱한 탓인지, 기자란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남의 말은 쉽게 믿지 않는 편이다. 특히 정치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쑤겠다"고 해도 의심부터 한다. 그래서인지 선거 관련 기사를 쓸 때는 '공약과 정책을 꼼꼼히 살펴보고 투표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지만 개인적으론 단 한번도 공약을 보고 누굴 찍은 적은 없다. 정치인의 약속은 어차피 지켜지지 않을 공약(空約)이란 생각이 강해서다.

박근혜 대통령이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주겠다던 기초연금 공약을 파기한 걸 두고 일부에선 '대국민 사기'로 몰아가지만 약속쯤이야 어길 수 있다고 본다. 돈이 없다는 데 어쩔 것이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대통령의 괴로움이 오죽하겠나. 대통령의 약속이니까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인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도 임기 중 무조건 지켜졌어야 맞다.

정말 실망스러운 것은 기초연금을 축소하면서 드러난 박 대통령의 복지에 대한 시각이다. 박 대통령은 복지 후퇴 논란에 대해 "세계경제 침체와 맞물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세수 부족과 재정건전성의 고삐를 쥐어야 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했다"며 "재정 여건이 나아지고 국민적 합의가 있다면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직접 "어르신들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에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까지 한 마당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게 맞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산이 있으면 더 주고 없으면 덜 주는, 그래서 경제 상황에 따라 요동치는 정책을 과연 복지라고 할 수 있는 지 의문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빈곤층의 숫자는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기초생활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당장은 경제가 어려워 예산이 부족하니 덜 주고, 재정 여건이 나아지면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입장은 정부의 재정 운용 방식으로 보면 옳지만, 복지 정책으로서는 잘못된 것이다.

있을 때 더 주고 없을 때 덜 주는 것은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어른이 되고 난뒤에는 부모님께 '가끔' 드리는 '용돈'에나 해당하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기초연금을 노인에게 주는 용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큰일이다. 국민에게 용돈 주자고, 그렇게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 '모두에게 줘야 할지, 일부에게 줘야 할지'를 놓고 국가적 논쟁까지 벌인다면 그것은 너무나 비생산적이다.

반대로 정부가 기초연금을 '용돈'이 아니라 '복지'로 본다면, 그래서 노인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경제 상황에 좌우돼선 안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다른 예산을 줄여서라도 확보해야 하는 게 복지 예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노인들이 생활안정을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기초연금으로 어느 선까지 노인들의 생활을 보장할 것인지, 당장 안된다면 장기 목표를 두고 단계적으로 어떻게 진행시킬 것인지, 가장 중요한 재정 계획은 어떻게 세울 것인지 꼼꼼히 검토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된 정책이라면 예산 편성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빚을 내서라도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대선 때 이미 정치권은 기초연금을 '용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책의 목표와 효과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저쪽 당에서 얼마 준다고 하니, 우리는 더 얹어서 얼마를 주겠다'는 식이었다. '철학 없는 복지'를 내세워 유권자를 유혹하는 행태는 막걸리, 고무신을 뿌려 표를 얻던 과거 금권선거를 떠올리게 한다.

현금성 복지 급여 확대처럼 복지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가장 천박한 수준의 복지로 평가받는다.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등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이 우선이다. 국민들의 복지 욕구가 높아지고 선거 때마다 복지가 핵심 이슈로 떠오를텐데 정치권은 언제까지 용돈 쥐어주는 천박한 복지로 승부를 걸 생각인지 답답하다. 당장 지방선거가 내년 6월이다.

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manb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