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특별 기고/9월 27일] "형의 고래는 우리 가슴 속 보석 아닐까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특별 기고/9월 27일] "형의 고래는 우리 가슴 속 보석 아닐까요"

입력
2013.09.26 11:17
0 0

최인호 형을 처음 본 것은 1972년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인호 형은 나보다 나이가 8살 위인 같은 대학의 4학년 복학생이었는데 이미 소설 '별들의 고향'의 일간지 연재로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는 신예 작가였다. 형은 내가 연습 중인 대학극의 연습장을 자주 놀러 왔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백양로 캠퍼스를 활보하는 나를 마주쳤을 때 괴짜 후배가 나타났다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2년 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별들의 고향'에서 산업화로 급성장한 도시 문명의 그늘에 묻혀 인간의 이기심에 짓밟히고 얼어붙은 한강의 하얀 눈밭에서 목숨을 버리고만 경아의 슬픈 이야기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며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다음 해 인호 형의 원작 각본으로 하길종 감독이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은 형이 직접 쓴 주제곡 '고래사냥'의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던 우리 젊은이들의 방황과 좌절과 사랑을 대변해주었다.

1977년 종합상사에 근무하고 있었던 나는 영화계에 뛰어들 열망으로 가득 차서 습작 시나리오를 들고 인호 형을 찾아갔다. 형은 나를 허황된 꿈을 좇는 돈키호테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친구인 이장호 감독을 소개해주었다. 몇 년 후 내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의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후 흐뭇하게 웃던 형은 내게 뚱뚱한 여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그 별명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 후 나는 형의 원작 각본으로 '적도의 꽃'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을 잇따라 영화로 만들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황진이'와 '안녕하세요 하나님'은 형의 원작 내용과 다르게 내가 몰래 각색을 하였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도 했다. '천국의 계단'으로 다시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되었을 때 천주교 신자로 거듭난 형은 여주인공이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써야 했던 삶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순수했던 옛 시절의 첫사랑을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을 쓰면서 원고지가 젖도록 펑펑 울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인가 형은 소설가로서 작품 세계에 더욱 깊이 몰두하면서 영화계와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나와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길 위에 길이 있다며 항상 장면 속에 숨어 있는 이중의 의미를 잊지 말라던 형의 가르침은 늘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지난 5년간 형은 암과 투병하면서도 창작 의욕에 불탔다. 투병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즐거운 고통의 나날들이라며 병세를 묻는 매스컴의 잦은 질문에 암 투병은 내 주요 메뉴인데 함부로 공개할 수 없다고 유머로 답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많은 소설, 시나리오, 산문, 희곡, 동화, 노래 가사를 통해 우리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었던 최인호 형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간밤에 떠났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 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고래를 찾으러 푸른 동해 바다로 떠났던 형이 찾은 고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형의 작품 속 어딘가에 비밀처럼 감춰져 있거나 아니면 우리들 가슴 속에 보석으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래 전 형에게 성경책을 선물하면서 속 표지에 내가 이렇게 주님 말씀을 적어드린 것이 기억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갈 수 없다.'

형이 손톱이 짓무르도록 힘들게 쓴 글은 이 지상에 충분히 남겼으니 이제 하나님의 품에서 편히 안식하길 바란다. 형의 오랜 연작 소설인 '가족'의 주인공 형수님, 도단이, 다혜 가족에게 마음 속 깊이 애도를 표하며 형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린다.

형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영화감독 배창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