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타계한 최인호는 시종 한국문학의 '별'이었다. 올해는 열여덟 나이로 혜성처럼 한국 문단에 등장했던 그가 등단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돌연한 침샘암 발병으로 5년간 투병해오면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올 봄에도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산문들과 짧은 소설을 모은 신작 을 선보였다. 투혼이었다.
1945년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고와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고2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이 가작에 입선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본격화하기 시작한 인간 소외와 팽배하는 물신주의를 세련되고 날카로운 필치로 그려낸 그의 초기소설들은 70년대 한국문학에 화려하게 꽃 피운 모더니즘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외부와 단절된 룸펜 지식인이 겪는 해체된 인간관계로 인한 심리적 파문을 움직이는 사물들이라는 환상을 통해 그려낸 '타인의 방'(1971)이 대표적이다.
태생부터 서울내기였던 작가의 모더니티에 대한 민감한 인식은 급속도로 진행되던 산업화와 도시화의 폐해로 인한 풍속과 심리의 변화를 날렵하게 포착했고, 그의 전폭적으로 새로운 소설들로 인해 한국 모더니즘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관념의 형태가 아니라 흉포하게 유동하는 현실의 징후로서 비로소 체현됐다. '술꾼'(1970) '모범동화'(1970) '병정놀이'(1973) '죽은 사람'(1974) '가면무도회'(1977) '돌의 초상'(1978) '깊고 푸른 밤'(1982) 등의 초기 단편소설들은 이 같은 작가의 문제의식에 기반한 작품들로, 한국문학사는 이 작품들을 근거로 최인호를 대표적인 70년대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그는 단편에서 보여준 현대적 미의식과는 구별되는 신문연재 장편소설들로 뜨거운 대중의 환호를 받은 스타작가이기도 하다. (1973) (1973) (1982) (1983)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장편소설들이 보여준 세련된 도시적 감성과 섬세한 심리묘사, 청춘의 고뇌와 열정을 상징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에 독자들은 열광했다. 덕분에 초기소설에 매료됐던 문단으로부터는 종종 대중소설가로 비판 받았지만,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별명이 '영원한 청년 작가'인 이유이기도 하다.
1980년대 가톨릭에 귀의한 고인은 85년 을 시작으로 등 역사와 종교를 다룬 장편 대하소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을 완간하며 더 이상 역사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침샘암 투병 중이던 2011년 첫 전작 현대소설인 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본령인 현대소설과 단편으로의 복귀를 선포했다. '최인호 문학 3기'가 열린 것이다. 그는 "일상이 탈 없이 흘러갔다면 요원한 일이었을 텐데 오히려 병으로 인해 이 작품들이 완성될 수 있었다"면서 "암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그의 투병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오래 전 알려진 사실이지만, 문단은 불시에 닥친 그의 부고에 슬픔과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연세대 1학년 시절부터 고인과 문우로 지낸 소설가 윤후명씨는 "과가 달랐는데도 느닷없이 찾아와 자기 소개를 하며 우리 한국문학을 잘 해나가자고 할 정도로 패기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너무도 안타깝다"고 했다. 평소 고인으로부터 애정 어린 조언을 많이 받아온 후배 소설가 조경란씨도 "가감 없이 한국문학의 큰 별이 졌다"며 "아직도 작품활동을 더 하실 수 있는 나이신데 너무 슬프고 허전하다"고 말했다.
25일 오후 7시를 넘겨 고인이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님이 오셨다"였다고 임종을 지킨 지인이 전했다. 일주일 전 상태가 다시 악화돼 입원한 그는 "어제도 그제도 기다렸는데 안 오시더니 오늘 오셨다"는 말을 남기고 평안하게 이 세상과 작별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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