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쿠데타와 유신독재를 미화해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말썽을 빚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사 고교 교과서'(교학사 간)가 기본적인 사실조차 엉뚱하게 기술해 놓은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구분하지 못한 채 같은 것으로 써 놓았고, 일제하 '국어교육'이란 표기를 조선어 교육으로 알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더구나 교과서 심의위가 지적해 삭제된 내용을 그 저자가 방송토론 등에서 계속 사실인양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대표저자는 지난 10일 MBC 100분토론과 3일 같은 라디오의 방송대담에서 장준하 선생이 5·16 쿠데타를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뜻있는 이들의 지지로 쿠데타가 무혈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당초 책의 초고에 포함됐으나 교과서 심의위가 수정 권고를 내려 최종적으로 없앤 것이다. 심의위원들도 그런 주장이 장준하 선생의 월간 를 통한 언론활동과 반독재 투쟁에 비추어 역사 평가를 왜곡할 소지가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의 발행인 겸 편집위원으로서 숱한 필화사건을 겪으며 중앙정보부에 연행당하는 탄압에 시달렸다. 그는 처음부터 권두언과 기획논설을 통해 끈질기게 쿠데타 군인들의 군대복귀와 민간정부 이양을 요구했다.
장준하의 5·16 쿠데타에 대한 입장은 발발 직후 나온 6~9월호에서 잘 읽을 수 있다. 6월호를 보면 4·19혁명 후 민주당에 실망한 그는 쿠데타에 대해 "우리들이 꽃 피워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것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계승, 연장"이었다. 그는 쿠데타 세력에 대해 '시급한 혁명공약 완수와 깨끗한 군대복귀'를 일관되게 요구했다. 7월호에서 그는 권두언을 통해 '궁극적 목표인 민주주의 복귀'를 역설했으며 구체적 방안으로 "국회의원 총선거 시행을 조속히 준비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8월호 권두언은 민주주의를 거듭 강조했고, 9월호에서는 5·16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국가 위기가 극복되는 즉시 정상적인 민간정부로 환원돼야만 그 근거와 명분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거듭 분명히 했다.
5·16쿠데타 직후 장준하가 지지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이 명백히 허위인 것은 7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유명한 논설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한 필화사건이다. 작성자가 함석헌이었지만 당시 중앙정보부가 우선 연행한 사람은 그의 강력한 후원자로서 사상계 발행인인 장준하였다. 이 글은 쿠데타에 대해 여러 가지 직설적인 비판과 경고를 담았다. "4·19혁명 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엔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이러다 군사독재가 됐다가는 어쩌나 하는 불안 속에 싸여 있다" "강아지를 길들이려 해도 강제만으로 안되는데 하물며 인간개조를 피스톨 하나로 해보려 해선 안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 정론직필 언론의 본본기로 꼽히는 이유는 이렇게 자유, 민주, 평화, 문화, 시대정신 등을 꿰뚫어 보는 논설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1953~70년 우리 지성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장준하의 는 당대 내로라는 학자와 논객들에게 매우 성능 좋은 마이크를 제공한 셈이었다. 백낙준 유진오 김재준 안병무 안병욱 김상협 김준엽 현승종 양호민 조지훈 박두진 최문환 한우근 홍이섭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편집위원과 필자로 참여해 국민의식을 일깨웠다. 이들과 함께 장준하는 그 시대의 장벽인 박정희 정권과 맞서 싸운 것이다.
결국 그는 유신독재가 극에 달하던 1975년 8월 등산 중 의문사로 타계했다. 지난해 그의 유골을 감식한 권위있는 법의학자들은 타살 심증을 강하게 제기했다. 당시 정권 측의 흉악한 마수가 뻗쳤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근본적으로 항일 광복군 장교 출신인 장준하가 박정희 등 일제 황군 출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를 지지했다는 역사기록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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