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쓴 사람이 그 윤동주(1917~1945)가 아닌 것처럼 가수 안치환의 노래 ‘편지’의 작사자도 그 윤동주가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 이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번 글은 독창적인 내 발언이라기보다 오류와 왜곡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좀 더 널리 퍼뜨리는 확성기나 다름없다.
대표적 386가수로 꼽히는 안치환이 라는 음반을 통해 ‘편지’(고승하 작곡)라는 서정적인 노래를 발표한 것은 1997년이었다. 가사는 이렇다.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첫 문장부터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가사인데, 이걸 윤동주가 작사했다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닌가. 앨범 발표 당시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누군가에 의해서 이 노래에 ‘윤동주 작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당연히 노래는 더 대접을 받게 됐고,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가사도 뭔가 있어 보이는 글로 평가받게 됐다. 이 가사를 받아쓰라고 수업시간에 불러준 국어교사도 있다고 한다. 가짜 윤동주의 편지는 ‘시를 노래로 만든 작품’ 목록에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명태(양명문) 목마와 숙녀(박인환) 향수(정지용), 이런 노래와 함께 당당히 인터넷에 올라 있다.
윤동주의 진짜 는 딴판이다. 시작노트의 원문대로 옮겨본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이 왓습니다.
힌 봉투에 눈을 한 줌 옇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부치지 말고
말숙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언제 썼는지 분명치 않지만 다음 작품에 1936년 12월이라고 표시된 걸 보면 이것도 그해 겨울, 윤동주의 나이 열아홉 살 때 쓴 것 같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노트에 담겨 있다.
웃기는 것은 인터넷에서 오가는 지식문답이다. 윤동주의 (가짜)를 분석해달라는 부탁에 대해서 어떤 문학교육자(?)는 김소월의 시 과 이 시를 진지하게 비교 설명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적 화자는 못 잊고 항상 생각하고 많이 울기도 하면서 진정 사랑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김소월의 시와 상통한다는 것이다.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라고 한 대목이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의 내 말이 ‘잊었노라.’”, 바로 이 대목과 비슷하지 않으냐는 주장이다.
더 웃기는 건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라는 대목이 어딘가 다른 곳에는 ‘자다가...’로 돼 있던데 어떤 게 맞느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건 가다가가 맞습니다.” 하고 점잖게 ‘원전’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지면 자다가 그리울 때도 있을 거고 그러다보면 자다가 깨는 일도 있겠지만, 참으로 어이가 없는 문답이 아닐 수 없다.
더 더 웃기는 건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다. 이 단체는 윤동주의 시 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대학(교) 학부생 및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윤동주 시 작곡 경연대회’를 창설했다. 첫해 금상 수상작은 였다.
그 작품의 가사는 바로 문제의 ‘그립다고 써보니...’ 그것이었다. 대체 무슨 심사를 어떻게 했기에 윤동주의 시도 아닌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을 최고작으로 뽑았을까? 윤동주의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 모아서 심사를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윤동주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대구의 한 중학생이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이메일을 통해 잘못을 알렸지만, 추석연휴에 이메일을 보내서 그런지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한다. 그 학생은 최소한 악보만이라도 삭제할 것을 건의했는데, 금상을 받은 악보는 여전히 홈페이지에 떠 있다.
윤동주는 물론 선의의 작곡자, 가수 안치환 등등 모두를 욕보이는 일이다. 악보 삭제 정도가 아니라 시상 자체를 취소해야 할 일이 아닐까? 물론 작품을 잘못 뽑은 데 대해 정중한 사과를 곁들여.
윤동주의 가짜 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바로가기) 금상을 받은 문제의 그 악보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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