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인 엄마 박모(40ㆍ공무원)씨는 11일 평소보다 1시간 이른 오전 6시에 일어났다. 박씨는 둘째, 셋째 아이를 서둘러 유치원에 보낸 뒤 오전 7시 50분 녹색어머니회 옷으로 갈아 입고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40분 간 교통지도를 했다. 출근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직장에 도착한 그는 상사에게 "늦어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박씨는 "학교 근처 횡단보도가 많아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통지도 차례가 돌아오는데 동생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자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직장인 여성이 늘면서 초등학생 자녀들의 등굣길 안전을 책임지는 녹색어머니회 활동이 자발적 봉사가 아닌 '울며 겨자 먹기'가 된 지 오래다. 지원자가 줄어 학교에선 참여 독려 가정통신문을 두어 번 보내다가 담임교사의 읍소로 겨우 숫자를 채우는 식이다. 아예 의무참여제로 전환한 학교도 있고, 일부 학교에선 대신 나갈 도우미를 개인 돈으로 고용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관련 당국은 대안 마련은커녕 "자발적 봉사활동"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다. 초등학생의 교통 안전 문제를 가족, 특히 어머니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녹색어머니중앙회가 소속된 경찰청 교통안전계에 따르면 경찰은 현재 교통 지도에 쓰이는 깃발과 형광봉 등을 지원하는 것 외엔 예산 지원을 하지 않는다. 경찰 관계자는 "녹색어머니회는 '내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봉사단체가 아니냐"며 "예산 부족으로 지원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영례 녹색어머니중앙회장은 "경찰청이 가끔 비옷을 지원하지만 개수가 턱없이 부족하며 그 외 정부 지원은 관할 구청이 지원하는 유니폼 구입비 정도"라고 말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6월 녹색어머니회를 지원할 법적 근거 신설을 골자로 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법이 없어서 지원을 못한 것이 아니다. 현행 자원봉사활동기본법에 따라 정부와 지자체가 녹색어머니회에 예산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는 엄마가 길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변혜정 충북도 여성정책관은 "전업주부가 많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여성 고용률이 70%에 이르는데 어머니들에게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며 "선진국처럼 양육 책임을 공동체가 함께 진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변 정책관은 "일단 정부 예산으로 녹색어머니 참가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장기적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지역사회가 함께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녹색어머니회는 1969년 '자모 교통 지도반'으로 출발해 2년 뒤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고, 2005년 경찰청 산하 비영리 사단법인이 됐다. 현재 전국 초등학교 6,640여곳에서 회원 53만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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