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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그건 윤동주의 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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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그건 윤동주의 시가 아니다

입력
2013.09.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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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종환 시인(현재 국회의원)의 시가 인터넷에서 왜곡ㆍ조작된 사례를 중심으로 ‘남의 글에 손대지 마세요’라는 글을 3년 전에 쓴 일이 있다. 이라는 그의 작품은 두 연으로 돼 있다.

1연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연은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로 시작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프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고 3연을 만들어 붙였다.

또 그의 작품으로 는 시가 인터넷에 올라 있는데, 도씨는 이런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어느 방송사의 일일 연속극에 그의 시로 소개된 는 산문집 에 수록된 ‘강물에 띄우는 편지’의 일부다. 그 글이 누군가에 의해 시로 둔갑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정호승 시인의 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이렇게 돼 있는 시인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로 제목이 바뀌어 있다.

어떤 사람이 며칠 전에 가을 시 한 편 소개한다면서 카카오톡으로 윤동주의 을 보내왔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운운하는 내용이다.

몇 년 전에도 다른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린 이 시를 읽고 이상하다고 했지만, 이건 윤동주(1917~1945)의 시가 아니다. 윤동주의 시를 웬만큼 읽은 사람이면 가짜라는 걸 알 수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순결한 젊음으로 식민지시대를 살다간 시인이 이런 교과서 같고 이발소 그림 같은 시를 썼겠는가. 그는 ‘내 인생의 가을’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하던 시인이 아니었다.

1948년, 그의 사후에 발간된 유고시집 에 정지용(1902~1950) 시인은 다음과 같은 서문을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윤동주는 그런 고독과 부끄러움과 괴로움, 엄격한 자기성찰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 가을이 등장하는 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하고 시작된다. 윤동주의 그리움과 부끄러움, 자랑스러운 이름에 대한 원망(願望)이 담긴 작품이다.

그런 시인이 안락한 소파에 묻히듯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며 우아하게 커피 한 잔 마시는 마음으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어쩌구 했을까? 정확하게 따지면 27세 1개월 반을 살았던 그는 생의 후반기 2년 정도를 형무소에서 보냈다. 25세 이후의 시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뭐어, 내 인생의 가을이라구?

윤동주는 라는 작품에서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인생이라는 낡고 진부한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정도다. 그런 시인을 누가 이렇게 통속적인 글을 쉽게 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을까?

웃기는 건 목사, 교수, 언론인, 국회의원, 의사 등등 사회적으로 알 만한 사람들이 칼럼을 쓰면서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라며 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옷깃을 여민다는 둥 삶을 반추한다는 둥 온갖 거룩한 폼을 다 잡고 있으니 우습지 않은가? 맨 처음 윤동주의 시라고 왜곡한 사람은 지금 발가락 사이의 때를 빼면서 낄낄거리고 있을 것이다.

안치환의 히트곡 도 작사자가 윤동주로 알려져 있으니 놀랍고 한심한 일이다. 이 시든 저 노래든 우리가 아는 윤동주 시인이 아니라 동명이인 윤동주의 작품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윤동주는 어떤 윤동주인지 왜곡의 장본인이 나서서 분명하게 밝혀주기 바란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더 이상 왜곡된 정보가 유포ㆍ확산되지 않도록 서로, 널리 알려야 한다. 윤동주 왜곡에 대해서는 이 글(보러가기)을 참고하시고, 다른 시의 왜곡 사례에 대해서는 내 글(보러가기)을 더 읽어보시기 바란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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