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명절 기분이 나질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다고 한다. 이번 추석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설, 크리스마스 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누군 명절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사실 어릴 적 느꼈던 명절과, 중년에 맞는 명절이 같을 수는 없다. 찾아 뵐 어르신들은 대부분 돌아 가셨고, 세대가 바뀌면서 친척들의 촌수가 멀어져 찾아올 사람들은 줄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명절이 명절 같지 않은 건 개인들 마음에 허전함만 주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추석은 원래 1년 중 제일 가는 대목이지만, 어딜 봐도 썰렁하기만 하다.
불황 탓도 있을 것이다. 선물 보따리 들고 들뜬 마음으로 고향에 내려가야 할 젊은이들이 취직조차 못하고 있으니, 또 이사철이 코앞인데 전세보증금 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명절이 되레 부담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훨씬 더 구조적인 곳에 있다. 소비패턴의 변화, 유통구조의 변화다. 명절다움이 사라지고 추석경기가 소멸된 것은 돈을 안 써서가 아니라 돈 쓰는 방식, 돈 쓰는 경로가 달라졌기 때문이란 얘기다.
우선 해외소비가 늘었다. 이제 추석ㆍ설에 대한 대중적 정의는 민족 최대의 명절 보다는 연중 최고의 황금연휴로 바뀌고 있다. 고향 가는 KTX 열차표 보다 해외휴양지 항공권이 먼저 동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해외여행이 늘어난다는 건, 소비가 국내 아닌 해외에서 일어난다는 뜻. 명절경기가 위축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명절소비 품목이 바뀌는 것도 그렇다. 아직도 추석 물품 하면 차례상에 올라가는 생선이나 과일이 먼저 떠오른다. 전통시장에선 지금도 주력 추석상품이 제수용품 위주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편의 또는 종교적 이유로, 차례 지내는 가정의 비중은 갈수록 감소하고, 차례상 자체도 간소화되는 추세다. 제수용품 중심의 추석경기는 점점 더 침체할 것이다.
탈(脫)백화점 현상도 눈에 띈다. 백화점 선물수요는 명절경기의 중요한 잣대인데, 여기에도 적잖은 착시요소가 있다. 백화점이 여전히 명절 선물의 주요 유통채널인 건 분명하지만, 최근엔 한우 굴비 과일 등 주요 선물 품목을 농어가와 직거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직거래 위주의 유통 혁명은 앞으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추석경기를 점점 더 썰렁하게 만들 것이다.
대목이 사라지는 건 경제에 불행한 일이다. 추석에라도 좀 흥청거림이 있어야 꽉 막힌 경제에 숨통이 트일 텐데 말이다. 그러려면 해외 아닌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게, 또 제수용품이나 백화점 선물세트 아닌 쪽에서 많은 소비가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
이 점에서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볼수록 흥미롭다. 11월 넷째 주 금요일, 그러니까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날을 지칭하는 블랙 프라이데이는 각 매장마다 새벽부터 소비자들이 장사진을 치는 풍경에서 엿보이듯, 연중 최대 쇼핑시즌의 개막일이다. 이때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한 달 동안에만 미국 1년 소비의 약 20%가 집중된다.
미국 추수감사절은 우리나라 추석 같은 명절이다. 미국도 경기에 부침이 있고 명절 세태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블랙 프라이데이 대목이 살아있는 건 파격적 가격인하 때문이다. 똑 같은 제품을 평상시 절반 가격에 파니까, 부자든 서민이든 기꺼이 소비에 나서는 것이다. 블랙 프라이데이 다음주 월요일엔 온라인 매장들의 대대적 세일에 들어가는 '사이버 먼데이'가 이어지니,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큰 대목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라마다 명절 소비관행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명절 때 파격적 세일로 대목을 형성하는 미국과, 반대로 명절이면 오히려 값을 올리는 우리나라의 모습은 확실히 대비가 된다. 대목이 사라졌다면, 대목을 새로 만들어가면 된다. 우리나라 유통매장이나 소매점들도 추석에 오히려 가격을 확 내리는 역발상을 시도해봄이 어떨까 싶다.
이성철 산업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