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심수봉이 부른 '여자이니까'의 서두다. 이제 여자라서 말 못하는 시대는 갔다. 연하남자에게 먼저 다가가 '대시'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세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연인보다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각박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어느덧 한가위가 다가온다. 명절귀성 차표를 사서 부모, 형제, 자매를 만나기 위해 기차역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은 여전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정성껏 장만한 선물꾸러미를 들고 일년에 기껏해야 몇 번 만날 수 있는 부모 형제를 향해 달음질치는 그 마음만큼 자연스러운 게 있을까. 손주 녀석들 좋아할 음식 장만 하느라 바쁜 할머니의 부엌 귀퉁이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만큼 더 따스한 기운이 있을까.
그런데, 오늘은 중요한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올해 한가위 가족모임 자리에서 딱 한 가지만 더하자는 제안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랑해요'라고 말해보자. 소처럼 일만 하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손을 보듬으며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말해보자. 얼마전 어느 행사에 갔더니 포항에서 온 '숙'자 돌림의 가정주부가 앞에 나서서 한 마디 했다. "우리 아버지는 세 마디밖에 안 합니다. '숙이 왔나?' '밥 먹었나' '숙이 가나?' 예전엔 그 속뜻도 모르고 평생 답답하고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는 별로 정이 없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근데 이제는 알아요. '숙이 왔나'는 왜 그 동안 연락도 없었느냐는 반가움의 표현이고, '밥 먹었나'는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는 표현이고, '숙이 가나?'는 자주 연락 좀 하고 잘 지내라는 당부의 뜻이었다는 걸."
가족간의 소통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염화미소(拈花微笑)인 가족의 마음을 누가 모를까. 하지만, 그래도 올해만큼은 꼭 표현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랑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도 있기에. 이혼율이 40~50%에 육박하는 우리 사회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바쁜 일상에 치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는 부부가 결국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는 비율이 그렇게 높아졌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부부간 얘기고, 피를 나눈 부모자식간에도 그런 게 필요할까 묻는 이가 있을 법도 하다.
미국의 연구에 의하면 부모와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은 아이일수록 정서가 안정되고 우울증이 예방되며 아이가 편식을 할 확률이 낮아진다. 우울증이 예방된다는 것은 자살이나 비행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얘기도 된다. 대화는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고, 진화시키는 윤활유다. 이 윤활유가 말라버리면 가족관계라는 엔진도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밥을 먹는 '패밀리 밀(family meals)'의 효과를 연구한 학자들도 대단하지만, 그냥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아이들의 삶을 그토록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게 더욱 놀랍다.
그러고 보니, 도시인들에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과 매일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사치'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일년에 몇 번 못 뵙더라도 우리는 짬을 내어 종종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사랑해요' 라고 말해야 한다. 따뜻한 사랑의 윤활유가 부모자식간 천륜(天倫)의 엔진을 더욱 힘차게 돌릴 수 있도록. "부모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사랑할 의무를 진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로부터의 사랑은 당신이 노력해서 얻어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그렇게 소중한 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서야!
이렇게 칼럼을 적는 나도 아직 좀 쑥스럽다. 몇 번 더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해보아야겠다. 일단은 내 얼굴만 보면 신발이 닳았느니, 얼굴이 지쳐 보인다느니 걱정의 말만 늘어놓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일단 소리 질러 보는 거다. "어머니, 사랑해요!"라고. 힘든 하루를 뒤로하고 귀가하시는 아버지에게도 틀에 박힌 "다녀오셨어요" 인사 대신 "사랑해요!"라고 해보는 거다.
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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