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에서도 영수회담은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실제 정국 타개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도리어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가 각자의 주장만 고집하면서 회담은 평행선을 달렸고 정국 경색이 도리어 심화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영수회담이 끝난 뒤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한 게 가장 큰 성과"라는 평가를 내는 장면도 반복됐다.
2008년 5월 20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은 회담이라기 보다는 토론의 장으로 변질됐던 대표적 사례다. 이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했지만, 손 대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의 불가피성을 조목조목 따졌다.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헤어졌고 양측은 영수회담 이후 의례적으로 발표됐던 합의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맹탕 회담' 이후 성난 여론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번지면서 이명박정부는 정권 차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5년 9월 7일 열렸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영수회담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난 회담 중 하나로 꼽힌다. 노 대통령은 국정 운영 동력 확보 차원에서 초당적 내각 구성을 위한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박 대표가 거부하며 사실상 회담은 결렬됐고, 이후 여야 정국 대치는 심화됐다.
물론 통 큰 양보로 영수회담의 체면을 살려준 경우도 있다. 1996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를 만나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처리 이후 사태 수습에 나섰고, 2000년 6월 의약분업 파동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역대 영수회담이 대체로 성과없이 끝난 이유는 정국 현안에 접근하는 양측의 인식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회담 성사에 급급해 의제조율 등 사전 준비가 소홀한 탓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국정동반자로서의 초당적 협력' 등 뻔한 합의문에 기초한 회담은 의미가 없다"며 "국정 운영의 전환점을 마련하겠다는 양측의 진정성이 확보돼야 회담의 성공도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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