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사는 친구가 참 좋다며 해설서를 보내왔다. 제 말에 따르면 낮에는 '개 같이' 벌고 저녁에는 술자리에서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는 처지이지만, 친구는 일종의 재가불자이다. 감히 출가할 염까지 내지는 못하지만, 외로이 삶 자체를 성찰하고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 마음닦음이 처절한 밥벌이나 중년의 방황에 어떤 효능을 발하는지 정말 궁금하지만 일단 덮어두고, 어쨌든 나도 그를 흉내내어 을 읽어본다. 매개되고 뒤엉킨 삶에서, 눈과 귀에 잔뜩 독한 홍진을 묻히고 난 뒤에 보는 근본적이고 묘한 말씀들은 분명 위안이 된다. 붓다 앞에 앉은 대중들은 깨달음을 위해 앉아 있다. 이 앉아 내려놓음은 정말 힘이 있다. 붓다는 중생이 진리를 물어보는 그 순간 이미 진리가 도래했음을, 그리고 만사는 일장춘몽보다 못함을 강론한다. 시간의 파괴력과 만사의 공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슬픈 일이지만, 참됨과 선을 향해 그리고 해방을 향해 열린 거의 유일한 길이다.
벌써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이명박정권 때, 정권 초기부터 이명박의 잔여 임기를 알려주는 인터넷 위젯이 유행했다. 재벌과 1% 부자들을 위한 대통령, 생령과 자연을 막 죽이는 4대강 정권이 지겹고 끔찍해 견디기가 어렵고, 어서 빨리 정권 교체가 오는 그날, 새 희망을 품을 그날을 맞고 싶다는 원망이 담긴 것이었다. 감옥에 간 것은 결국 이명박의 형과 심복들이었고 또 앞으로도 감옥에 갈 것은 그들일 것이다. 세상을 호령하고 권력을 누렸지만 그들의 끝은 초라하고 구차하다. 결국 이명박정권에 민이 승리한 것이다.
뭘 보여준 게 없어 박근혜 정권을 아직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처음부터 '대선 불복'이니 '정통성'이니 하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이명박의 유산이라 다 털고 가면 좋은데, 되돌아오는 건 엉뚱하게도 내란음모사건과 공안몰이다.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과 공작정치 탓에 사회 한켠에서는 강렬한 원망과 증오심이 산처럼 쌓여간다. 이 정권을 유신에 비유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병들어간다며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한다.
내 생각은 약간 다르다. 파시즘으로 가려면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사회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상식과 이성은 살아있다. 게다가 과연 '글로벌자본'이 유신 같은 걸 좋아하겠는가. 비록 늙은 공안파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지는 몰라도 유신 때와도 구조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때는 아예 앞이 보이질 않았다. 희망이 없으니 전태일과 김상진이 그런 식으로 목숨을 버렸고, 박정희유일체제가 어떻게 연착륙해야 할지 모르니, 공작정치와 공안통치의 당자인 중앙정보부장이 보스를 죽였다. 김형욱이나 김재규가 남긴 역사적 교훈은 별도로 중요한 것이다. 과연 오늘 국정원 하는 일이 국민과 대통령을 위해 보탬이 될까? 국정원 개혁에 나서야 할 사람은 바로 박대통령 자신이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 시절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이미 낡아빠진 87년 체제의 헌법이라지만, 대통령 임기가 5년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화무십일홍'이나 '권불십년' 같은 단어보다 우리 헌법이 더 지혜롭다. 이 정권도 4년 밖에 안 남았다. '대통합'이니 '경제민주화' 같은 듣기 좋은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지지율이 높다지만 사상누각보다 못하다.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면 '차기대권구도'가 가시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가장 청명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9월이 벌써 꺾였다. 한줌도 안 되는 낡은 이념의 신봉자들을 빌미 삼아 매카시선풍을 불러일으킨 자들의 정치쇼를 보느라 아까운 시간이 간다. 추석이라 참 다행이다. 똥 같은 냉전적 증오와 비이성을 온 세상에 흩뿌리고, 쓰레기보다 못한 댓글 다느라 바빴던 친구들도 며칠 좀 쉬어라. 허망하게 한줌 먼지로 돌아간 네 부모와 조상의 영혼 앞에 가서, 청주 한 잔 마시고 숨 좀 골라라. 삶이 그런 것이던가. 권력도 한 순간이다. 비록 '금강'에는 미치지 못해도 우리는 오래 갈 선한 일을 도모하고 바라야겠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