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양이 매일 아침 떠오르는 '일출'(日出)을 보며 살아가지만 '지구'가 떠오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 지구가 떠오르는 모습은 어떨까?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968년, 우리는 지구의 모습을 비로소 지구 밖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인간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 아폴로 8호가 달 착륙에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달 주위를 돌고 있었다. 이 때 아폴로 8호는 사진 한 장을 지구로 전송했다. 잿빛으로 채색된 황량한 달의 지평선 위로 암흑의 우주 속에서 지구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미국의 한 시인은 이렇게 적는다. "파랗게 빛나는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소리 없는 영원 속에 떠다니는 조그만 그 무엇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스스로를 이 지구의 승객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를 지구촌의 가족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아름다운 '지출'(地出)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진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세계화와 같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공동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다. 그러나 오늘, 그리운 가족을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는 명절날에 이 광경을 떠올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제는 너무나 많이 보아서 거의 감동을 받지 않는 지구가 떠오르는 지출의 광경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깜깜한 우주 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운 파란 공으로 보인 것은 바로 인공위성이 지구로부터 40만㎞ 떨어진 우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저토록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것도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억4,960만㎞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 아름다운 지구의 가족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 '적절한 거리' 때문이지 않을까?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지금보다 조금 더 짧아지거나 멀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지구에서 생명이 없어지고,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의 모습은 황량하게 변색될 것이다.
나는 사람의 관계도 '거리'가 있어야 가족으로서의 '친밀감'을 더 느낀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사랑은 항상 어떤 사람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감정을 전제한다. 그것이 가족애이든, 우애이든, 성애이든 사랑은 항상 권력과 이해관계로 얼룩진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넘어선다. 우리 사회가 치열한 경쟁사회로 치달을수록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과 내적인 친밀감을 느끼려면 외적으로도 가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집단의 동질감을 강화하여 내적인 소속감과 주인의식을 고취하고자 할 때면 으레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사람 사이에 살가운 정이 생기려면 우선 거리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 갈린다"는 속담이 말해주는 것처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들이 막상 만나면 예기치 못한 갈등이 발생한다. 서로를 감싸기는커녕 비교하며 비방하고, 정겨운 말을 주고받는 대신에 인간관계의 생채기를 덧나게 만드는 험담이 오고 가기 일쑤이다.
왜 이런 걸까? 가족이란 미명 아래 사람들 사이의 적정한 거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은 본래 그 구성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적 토양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가족은 종종 개인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뜨거운 용광로로 변해버린다. 가족이 사랑의 공동체인 것은 온갖 결점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을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인격체로 온전히 보듬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으로 보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줄 정도의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이번 명절엔 사랑하는 가족에게 적정한 거리를 두고 더 잘 대해보자. 그러면 우리 가족은 휘영청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더 온전하고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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