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그 날, 하늘은 티없이 맑았다. 배를 주리던 고난의 시기였지만 동쪽 하늘에 둥글게 올라오는 보름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환했다.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다음날 조상에 올릴 음식을 보자기에 싸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사이판 섬 해역에서 발생한 14호 태풍 '사라'가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맹렬한 기세로 한반도를 향하고 있었다.
1959년 9월 17일 최대 풍속 초속 85m, 중심부 최저기압 952헥토파스칼에 이르는 초대형 태풍 사라가 제주를 거쳐 남해안을 강타했다. 11일 처음 발생한 태풍 사라는 많은 비를 뿌리며 한반도를 향해 다가왔지만 중앙관상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될 걸로 판단해 버렸다. 하지만 17일 새벽 제주도에 상륙한 후 동이 트면서 초속 40m의 강풍으로 변하며 사나워졌고 산더미 같은 해일과 폭우를 동반하며 섬 일대를 난타했다. 소형 자동차들은 운행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모든 행정 기능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평생을 섬에 살며 바람과 싸워온 제주도민들이었지만 초가 지붕과 함께 삶의 터전이 날아가는 강력한 태풍 앞에서는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제주도를 통과한 태풍 사라는 남해안으로 방향을 틀며 부산과 영남지역 등 낙동강 일대를 진흙과 흙탕물로 변모시켰다. 추석을 맞아 성묘를 위해 길을 나서던 주민들은 도로가 끊어져 고립됐고 강물은 과수와 농작물로 뒤덮었다. 거제도 앞바다의 절경이었던 한 쌍의 촛대바위 중 신부를 상징하는 촛대바위가 두 동강났고, 부산 산복도로의 판자집 중 절반 이상이 바람에 휩쓸려 맥없이 날아갔다. 몰아치는 파도와 해일로 오륙도의 형체마저 알아보기 힘들었다니 그 피해가 오죽했으랴 싶다.
사라호는 17일 오후 대구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져나가 소멸됐지만 사망·실종 849명의 인명피해와 이재민 37만3,459명을 남겼다. 손실액 또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21일 이승만 대통령은 동포애를 발휘하여 이재민을 돕자는 내용의 특별 담화를 발표했고 이후 전 국민적인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국가적인 재난 사태에 처음으로 군 병력이 투입된 것도 이 때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온 태풍은 사라로 기억되지만 재산상 최고의 손실을 가져온 것은 2002년의 태풍 '루사'다. 강원 강릉지역에 하루 동안 871mm에 달하는 비를 뿌리며 5조150억 원의 막대한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2003년의 '매미'또한 중심기압 965헥토파스칼의 강력한 바람과 함께 남해안을 덮쳤었다.
수많은 태풍이 우리나라를 덮쳤음에도 사람들은 사라를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기억한다. 이는 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어려운 시절, 민족 명절인 추석에 발생한 것이 주된 이유인 것 같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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