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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정든 고향 떠나야 한다니 잠도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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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정든 고향 떠나야 한다니 잠도 안 와…

입력
2013.09.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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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들 묘소가 없어지니께 일가친척들도 통 모이질 않아… 사람은 모여 살아야 사는 맛이 나는디 말여"

16일 오전 잡풀이 무성한 장남평야를 가로질러 전월산 기슭 양화리 마을에 들어서니 길옆에 늘어선 폐가들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160여 호 되는 큰 동네이건만 인기척이 없다. 무너진 담장 옆 남새밭에는 콩과 파가 드문드문 심겨져 있고 간혹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깰 뿐이다. 동네 한 가운데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서너 사람이 웅성거리며 무엇인가 다듬고 있다.

"아들 내외가 온다고 혀서 땅콩이나 다듬고 있지유"

"농사채도 없어지고 이번 추석 쇠고 나면 여길 다 떠나야 한다니께 착찹하기만 하네유"

성순희(74)·이창순(여·76)· 송인창(여·76)· 임헌란(66·남)· 임인철(남·73)씨 등 양화리 주민들은 골목길 한 가운데서 땅콩을 다듬으며 다음 달이면 이사 갈 걱정을 나눴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세종본부가 내년부터 이곳을 단독주택용지로 조성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다음달까지만 머물게 했다.

양화리 일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부터다. 고려 공민왕 때 충신인 임난수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제주도에서 왜구를 토벌하다 오른팔을 잃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죽음을 극복하고 고려를 지킨 인물이다. 임 장군은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고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하다가 풍광이 수려하고 너른 벌판이 좋아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세종은 조부인 이성계를 돕지 않았지만 임 장군의 충절을 높이사 이곳 장남평야 일대를 하사했다. 당시 임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암수 두 그루가 지금도 기세 당당하게 자라고 있다.

부안 임씨 전서공파 일가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20여대를 이어왔다. 이제 임씨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세종'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충신을 알아본 현군(賢君) 세종과 충신 임난수 장군의 인간관계가 680여 년이라는 세월 속에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부안 임씨 전서공파 18대 손인 임헌란 양화리 이장은 "조상님들 묘소가 없어지니 일가친척들도 한자리에 모이질 않는 게 가장 서글프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시나브로 떠나더니 이제는 6가구 30여 명만 남았다. 이마저도 다음달이면 떠나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임씨는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 그는 양화리 인근 조치원읍내에 이사 갈 아파트를 장만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3-4가구는 이사할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거나, 아파트 입주시기가 맞질 않은 탓에 임시로 이사할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임인철씨 내외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문전옥답을 보상받아 겨우 신도심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하지만 2015년 3월에나 입주할 수 있어 올해 말부터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아파트 중도금 넣고 나면 전세 구하기도 어려워 난감한 실정이다. 임씨는 "올해 겨울만 나도록 해주면 좋으련만… 가을걷이하고 이사할 생각에 잠도 안 온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종시 수정안' 파동으로 입주시기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충북 오송에서 24살 때 양화리로 시집온 이창순씨는 5년 전 남편을 여의고는 지난해 조치원읍내 아파트로 이사 했다. 이씨는 이사를 했지만 일주일에 서너 번은 이곳에 놀러 온다. "아파트에서는 소리도 크게 못 지르고 답답해서 못살겠다. 그래도 여기 나오면 숨도 쉬고 소리도 맘껏 지르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지런하게 땅콩을 다듬었다.

윤형권기자 yhk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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