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후문에 제철 채소 몇 종류를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에게서 가지 열두 개를 사온 것이 열흘 전쯤이었다. 보통은 식재료를 이렇게 많이씩 사지는 않는다. 식구는 둘뿐이고 집을 비울 때가 많은 데다 요리를 즐기는 편도 아니다. 솔직히 물컹하게 씹히는 가지를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 막상 집에 들고 와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걸 다 어쩌려고? 끝물이 더 맛있다며 비닐봉지에 자꾸 더 넣어준 할머니도 할머니였지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가지의 짙은 보라색에 잠깐 정신이 팔렸던 게 분명하다.
어쨌든 부지런히 가지로 음식을 만들었다. 하루는 쪄서 국간장으로 무쳤고 하루는 굴소스와 케첩을 넣고 돼지고기와 함께 볶았다. 대강 그릴에 굽기도 했고 모차렐라 치즈를 올려 굽기도 했다. 맛은 둘째 치고 냉장고에 남은 가지의 수가 줄어들 때마다 안심, 안심. 그러다 남은 네 개 중 두 개를 꺼내 볶으며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뿌듯해 하던 어제 저녁, 비로소 내가 가지와 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가지에는 여름의 향이 배어 있구나. 가지의 식감이란 물컹한 게 아니라 살캉한 거구나. 또 익힌 가지의 튀튀한 색깔보다 흰 그릇에 남은 보라색 얼룩이 먼저 띄었다. 따로 남겨두고 싶을 만큼 어여쁜 무늬. 이제 딱 두 개 남았다. 오늘 저녁엔 어떤 가지 요리를 해 볼까. 떠나가는 올 여름을 위한 송별 식탁이 될 것 같다.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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