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은 개발도상국이 성장동력의 다변화에 실패하여 선진국 도약에 필요한 추진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답보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국가적 성장드라이브를 세계적 경쟁에 노출된 몇 개의 주력업종에 우선적으로 의존하다보니 다양한 분야의 신규고용이 제한되고 균형발전이 지연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경제내부에 이중적 구조가 확실히 자리잡으면서 저개발 국가에 비해서는 비용 경쟁력이, 선진국에 비해서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진퇴양난의 딜레마가 전개된다.
사실상 중산층 퇴조와 체제유지 비용의 급증은 기존 패러다임하에서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존 성장의 축이었던 대기업과 안전자산에 과도하게 의존한 따라잡기(catch-up) 우선의 성장패러다임으로 인해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은 제한되었고 결과적으로 대내외 충격에 취약한 시장여건이 고착화되었다. 더욱이 금융분야에 만연한 위험기피차원의 쏠림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전례 없이 자원배분은 편중되고 자산가치마저 저하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 고도성장에 익숙한 우리의 경우 자산가격의 상승은 풍부한 일자리와 더불어 부를 창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커져버린 자산포지션의 이면에는 과도한 부동산 담보대출이 자리잡고 있다. 부동산 과다보유에 따른 자산양극화는 소득양극화로 이어져 계층간의 갈등요인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다양한 투자기회가 제약된 가운데 풍부한 유동성 장세가 지속되면서 파악하기 어려운 자산버블이 생성됐고, 이후 각종 세제나 규제를 통해 버블을 통제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왔다. 그 결과 규제와 완화가 범벅이 되어 거래가 실종된 시장에서 부동산은 점차 제값을 받기 어려워졌다. 버블의 과도함을 조절하기 위한 체제 유지비용은 모두를 족쇄(straightjacket)에 가두면서 소득감소나 담보가치 하락에 따른 중산층 퇴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현금흐름의 악화로 부동산마저 처분대상으로 전환되면서 중산층은 이중의 충격에 노출된 상태이다.
자산토대의 붕괴에 따른 중진국 함정은 비기축통화국의 필연적 경로이다. 생산성 낙후부문이 존재하는 한 수출부문과의 생산성 갭은 결과적으로 실질환율 절상압력에 노출된 자본흐름과 자산버블과정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게 된다. 반면 선진경제 진입을 위해 필수적인 다양성 확보를 위한 금융의 역할은 이중구조하의 대외 경쟁력 유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분열된 가치창출 기반을 창조경제로 통합하면서 다양성을 추구하려면 일방적인 절상압력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본의 장기침체도 사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가 일방적 강세에 노출된 것이 단초였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이제부터 절상압력을 잘 관리해야 장기침체를 피할 수 있다. 그런데 통합환경에서 환율안정을 위한 노력이 국가단위로 주도될 때 주변국과 자국에 대한 피해는 불가피하다. 국경간 자본흐름이 확대되는 가운데 자본유출입 관련 교란요인을 통제하면서 안정적 성장구도를 확보하기는 점차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은 보다 큰 틀에서의 접근이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글로벌 환경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로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커져버린 몸집에 걸맞는 심장 교체작업을 주도할 역내 리더쉽이 절실하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은 역내자산을 안정적으로 포장해주는 역내통화단위의 개발과 이를 활용한 금융자산의 공급이다. 성장으로 불가피한 절상압력을 완화하면서 균형잡힌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는 병행통화방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통화단위를 활용한 자산의 활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기능을 지지하기 위한 시장기구의 구축도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미국중심의 국제금융체제를 활용하여 성공을 일구었지만 이제부터는 역내의 경제적 중요성에 부합하는 자체적 금융시스템을 조금이라도 발전시켜야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이상 외부금융에 의존하여 선진국 진입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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