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 재즈 vs 유학파 재즈"젊은 뮤지션들은 이론·지식으로 무장… 윗세대인 우리는 느낌으로 연주""뉴욕선 연주자들이 자기 음악에 몰두… 국내 재즈계, 업소 중심 시각 길들여져"재즈 저변 얕은 한국"대중가수와 협업 10여년전 첫 시도… 선배들한테 욕도 좀 얻어 먹었지""미국엔 재즈 콘테스트 많은데 한국도 실질적 평가시스템 정착 필요"이정식은 레슨을 안 한다?"아버지의 색소폰 스타일 계승됐으면""어느정도 완성된 사람에 한해 레슨할 것"
이정식(52ㆍ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 이발차(33ㆍ서울예대 등 실용음악과 강사)씨는 부녀지간이다. 그러나 살아 온 삶의 풍경은 너무나 다르다. 이른 나이에 가장이 돼 악기를 무기 삼아 생활전선에 나서 일가를 이룬 아버지, 뉴욕에서 세계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과 겨룬 딸. 비록 한 때 사회적 붐을 이뤘다고는 하나 소수의 예술인 재즈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레 미래에 접안했다.
거칠게 말하면 두 사람은 한국적 재즈와 서양적 재즈로 음악적 지향점이 나뉘질 것이다. 그러나 보다 깊이 들어가면 경험과 감각의 국내파, 이론과 지식의 유학파라고 하는 위상 차가 드러난다. 두 사람의 자산이 모여 또 하나의 형식을 만들어 낼 날이 먼 미래의 일일까.
재즈는 이종(異種) 격투장이다. 전혀 이질적인 성분의 음악을 한 데 묶어내 새로운 스타일로 연결 짓는다. 딸은 바다 건너가 뉴욕 펄처스 칼리지 재즈 스터디과에 입학해 미국 것과는 다른 한국의, 아버지의 재즈를 재발견했다.
그 곳 주자들은 우선 자기 음악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클럽에서조차도 손님이 이해하건 말건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반의 귀에 익지 않은 곡들을 고집하면 다음 일자리 끊길 걱정을 해야 하죠." 이제 국내 상황을 뻔히 알게 된 딸은 설명한다. "그렇게, 업소 중심의 시각에 길들여져 가는 거죠."
대선배로서 아버지도 할말이 많다. 그는"젊은 뮤지션들이 이론과 지식으로 연주한다면, 윗 세대는 느낌으로 한다"며 "틀려도 듣기에만 좋으면 괜찮다는 감각적ㆍ결과론적 입장"이라고 했다. 이러한 한국적 상황은 절박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한국적 관점에서는 학교들의 비즈니스가 돼 버렸다. 어떻게든 취직시켜줘야 한다는 강박에 옥죄어 있다."
실력을 객관화하는 잣대, 즉 콘테스트를 구조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데 두 사람은 이견이 없다. "미국은 연주자의 실력을 객관화하는 콘테스트 제도가 많죠. 특히 재즈 페스티벌이 주최하는 콘테스트의 영향력은 엄청나죠."문제는 실질적 평가 시스템을 정착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재즈의 저변은 얕다. 재즈만 갖고 자신을 차별화시킬 필요성을 한국의 재즈 지망생들은 못 느낀다는 것이다. 실용음악과 내에서도 재즈 지망생은 1할 정도라는 게 아버지의 첨언이다. 재즈 연주자 숫자가 실제로는 증가했지만 그들의 다수를 이루는 해외 유학파들이 현장 연주보다는 방송이나 학교 쪽으로 새어나간 데다, 국내파들과의 교류는 전무했다. 이른바 IMF체제가 던져준 빈핍의 상황에 특히나 기초체력이 약했던 재즈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이다.
"나는 그래도 꾸준히 활동했다. 1997년 '이정식 인 뉴욕'을 필두로, 'Collaboration''화두' 등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다."잔뜩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때,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재즈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다."당시 그는 이를 테면 역할모델이었다. 재즈라면 곧 이정식이라는 등식은 거의 통념이었다. 당시의 자신을 보고 재즈맨의 길로 들어섰다는 후배를 그는 가끔 맞닥뜨린다.
"그러나 나는 어떤 미학적 모델이 되고 싶었다."'이정식 인 뉴욕'에서 거장 론 카터와 협연할 당시 미국서는 북한과 대치 중인 한국에 재즈가 있느냐는 선입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는 몸을 던졌다. 식구들에게도 제대로 얼굴을 보여주지 못할 정도였다. 이승철 김현철 박광현 등 대중 가수들의 노래 배경에 유려한, 때로는 현란한 색소폰 소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다.
"가요 쪽 작업에 주력하다 보니 재즈계 선배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던졌다. 지금 거장으로 자리 잡은 마이클 브레커(색소폰)도 가수 취입 때 세션맨이었지 않느냐는 변명 같은 항변이 그의 입에서 나왔던 때다. 거기에 딸 발차 등 자식들이 쑥쑥 크며 아버지를 무언으로 압박해 왔다. 또 그 이후 색소폰의 장효석 이인관, 피아노의 송영주 조윤성 등의 가요계 진출 이 일반화했으니 세상일이 참 묘하다 싶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가까이 봤을 발차의 말도 좀 묘하다. "아버지가 일단 자랑스럽다"니… 도대체 왜, 유보 조항을 달았을까? 딸이 보기에 아버지는 현실에 너무 겁박돼 있었나 보다. 그녀는 "후배 양성 측면에 소홀했다"며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연주 스타일도 끝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 대목에서 아버지는 졸지에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도 그런 점은 반성한다. 후배 색소폰 주자를 기르는 일에 소홀했다는 점은 반성한다."말하자면 이정식 류(流)의 아쉬움이다. 그는 반성했다. "레슨을 하지 않은 것은 나 아니라도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일을 전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색소폰은 절멸될 것인가? 대금과 플루트를 이씨가 조합해 만든 개량 악기, '식금'(植琴ㆍ이정식 대금)까지?
언제부터인가, '이정식은 아예 레슨을 안 한다'는 말이 정설로 굳었다. 그 같은 소통 불능의 징표가 본인에게도 몹시 불편하다. 어쩔 텐가? 그는 다짐했다. " 이제 진정 학구적으로 배우고 싶어하는 자 있다면 (레슨을)할 것이다." 여기에 단서가 붙지 않을 리 없다. "단 어느 정도 완성된 자에 한해서다." 풀어서 말한다면? "자신만의 감성을 색소폰 안에 싣는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소리를 자신 있게 낼 수 있는가 하는 사람 말이다."외부에 첫 공개하는 말이다."솔직히 (아써 터득한 기술이) 아깝지만 이제 모두 오픈 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그가 레슨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분명 배워 놓고 내 스승이 아니라고 부인 당한 일을 겪고 나서다. 그러나 이제 학교로 들어와 학생들 가르치다 보니 그는 부모의 심정 비슷해지는 걸 느낀다고 했다."젊어서 곤궁의 시기를 겪었던 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에 더 관심이 간다." 모질게 산 유랑악단 시절이 자연스레 생각나는 모양이다.
가상의 제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재즈는 죽을 때까지 해야 된다. 그래도 끝이 안 난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편안하게,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만 하려 해도 부족하다."깊숙이 쟁여두었던 어떤 허기를, 기자는 느낀다. 그는 답했다."체념이란 나름의 대응책이다. (나의 부족에 대한)판단이 그런 이상 체념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는 못 견딘다."
그는 딸에게 당부했다. "누가 들어도'야, 저건 발차 연주네'라고 무릎을 칠 소리를 가지라"고. 그가 심취한 국악 이야기는 덤이다. "화성, 박자, 선율이라는 음악의 3요소 중 하나만 택해 파고들어도 너무 어려운 것이 재즈다. 국악 하는 사람들이 위대한 것은 그 모두를 융합해 내는 능력 때문이다."
"2년 뒤 아들도 귀국… 세 식구 재즈 트리오 결성할 것" 이발차 창작곡 데뷔앨범 준비 중
발차라는 다소 튀는 이름은 증조부가 "발차고 나갈 아이"라며 지어준 이름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프라노인 아그네스 발차에게서 따 왔다고 우스개로 덧붙이지만. 여하튼 많은 기대가 얹혀 있는 이름이다.
그는 지난 2010년 뉴욕 펄처스 칼리지의 재즈 스터디 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아버지 이정식씨는 그가 열심히 잘 활동하고 있지만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조금은 걱정스럽다며 걱정이다. 그러나 어려운 게 닥치면 굳이 정격을 고집하지 않고 제 스타일로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고 은근 자랑이다.
발차는 자신의 창작곡만으로 된 데뷔 앨범을 준비 중이다. 가칭 이발차 밴드에 이정식 피처링(특별 출연)의 형식이 될 음반은 지난 1월부터 뉴욕에서 녹음 중이다.
한편 동생 용문(30)은 색소폰 주자로 뉴욕주립대 빅밴드와 뉴욕 블루노트 클럽의 단원이다. 2년 뒤 그가 귀국한다면 세 식구는 밴드를 결성, 일가족 재즈 트리오라는 기록도 세울 전망이다. 녹음과 뮤직 비즈니스를 공부 중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염원 하나. "나이도 찼으니 시집 가야죠. 무엇보다 순리대로 사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음악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에는 쉽지 않았던 인생 역정의 지혜가 스며 있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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