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한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안을 두고 파이낸셜타임스는 "현실정치의 승리"라고 논평했다. 시리아 사태로 팽팽히 대치하던 양국이 결국 현실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며 타협안을 찾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개입에 반대해온 러시아는 합의안 불이행에 따른 후속조치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맡김으로써 군사제재를 막을 장치를 마련했다. 미국은 단독 군사개입 가능성을 유지하는 한편, 화학무기 폐기 이행 단계마다 구체적 시한을 정해 시리아의 합의안 위반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합의안 마련으로 시리아 정권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은 군사개입에서 외교적 조치로 사실상 전환했다. 합의안은 안보리의 승인 절차를 밟게 된다. 시리아 정부는 "사태 해결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논평하며 합의안 이행 의사를 밝혔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합의안 마련을 위해 12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마라톤협상을 진행했다. 군사개입 여지를 명시하는 문제 등으로 진통을 겪던 협상은 시리아가 화학무기 보유 현황을 조기 공개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급진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라브로프는 "시리아가 (가입 승인 한달 뒤인) 화학무기금지협약(CWC) 발효 시점부터 이행할 의무사항을 즉각 이행하겠다는 확약서를 썼다"고 언론에 밝혔다.
시리아는 합의안에 따라 ▦포괄적 화학무기 정보 제출(일주일 내)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사찰 완료(11월 말) ▦화학무기 생산·충전 장비 우선 폐기(11월 말) ▦모든 화학무기 재료ㆍ장비 폐기(내년 상반기)를 단계적으로 이행해야 한다. 사린가스 등을 만들어 로켓에 충전하는 능력부터 제거해 화학무기 사용 가능성을 차단한 뒤 재료와 기타 장비를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안이 순탄하게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리아 정권이 화학무기 정보를 은폐할 수 있고, OPCW 조사단 활동이 정부 측 방해나 내전 상황 탓에 지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화학무기 전문가인 에이미 스미슨 제임스마틴센터 연구원은 "통상 5, 6년 걸리는 규모의 군축 작업을 몇 달 만에 해치우겠다는 전례없는 방안"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12일 화학무기 폐기 방침을 밝힐 당시 미국의 시리아 반군 지원 중단, 이스라엘의 CWC 비준을 요구했다면서 시리아가 합의안 이행을 또다른 협상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3년째 지속되는 시리아 내전이 합의안 마련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을 가능성은 높다. 특히 친서방 온건파와 알카에다 계열 과격파의 내분이 심화하고 있는 시리아 반군의 역학구도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의 군사개입을 기대했던 온건파 안에서 배신감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입지가 축소될 것이라는 분석도 그 중 하나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반군 지휘관은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시리아 민주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며 "알 아사드 정권을 돕고 있는 이란의 군사적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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